임권신도비(任權神道碑)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우부빈객 증시 정헌(貞憲) 임공신도비명 : 서문(序文)을 아울러 쓰다.
숭정대부 전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이사 소세양(蘇世讓)이 글을 짓고,
봉헌대부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이 글씨를 쓴다.

주부 임중신(任重臣)이 이조참판 정유길(鄭惟吉)공이 지은 행장을 받들고 지친 모양에 상복을 입고 호남 사백여리의 먼 길을 달려 임하(林下)로 나를 찾아와서 그 부친 참찬 정헌공(貞憲公)의 명문(銘文)을 부탁하였다. 아! 나와 사경(士經)은 같은 해에 태어나 상투 틀 무렵부터 교유하였는데 백발에 서로 이별하고 외롭게 아득히 멀리 있어 슬픔만 마음에 가득하니 내가 차마 사경의 명을 짓겠는가? 더구나 지금 늙고 정신도 어지러워서 글 쓰는 것을 폐해버리고 잊었으니 어떻게 사경의 행적을 널리 알려서 그 실상이 없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할 수 없어 이에 서술하고 명하노라.
행장을 살펴보니, 임씨(任氏)는 풍천(豐川)의 이름 있는 성씨이니 대대로 이름난 인물이 있어서 국사에 분명하게 실려 있다. 공의 이름은 권(權)이고 사경은 그 자이다. 부친은 유겸(由謙)이니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소간공(昭簡公)이다. 조부 한(漢)은 수안군수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증조부 효돈(孝敦)은 보은현감을 지내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양대의 증직은 모두 소간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친 정부인 이씨는 청단찰방(靑丹察訪) 증 병조참판 신(愼)의 따님이니 성화 병오년(1486, 성종 17) 정월 5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남보다 뛰어났으며 겨우 칠팔 세 때에 능히 책을 읽고 대의를 알아서, 학문에 뜻을 두기 전에 이미 4서 3경을 두루 암송하였다. 그 형 사균(士鈞)과 함께 애써 학문에 힘을 쓰니 거의 침식을 잊을 지경이라 비록 부모지만 혹간 그만두기를 권하였다. 소간공은 아들 다섯을 두어 모두 재주가 풍부하고 드러났는데 공과 사균이 실로 그중에서 가장 빼어났으니 사균은 바로 관찰공 추(樞)이다. 관찰공은 늘 “내 동생의 학문은 정대하고 지절을 지침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니 진정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정묘년(1507, 중종 2)의 진사시에 합격하고 계유년(1513)에 을과로 문과에 올랐다. 형제가 이미 훌륭한 명성을 가지고 계속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여 옥처럼 아름답게 조정에 서니 풍채가 밝고 준수하여 보는 사람들이 쌍 구슬이라 하였다.
처음에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되고 예문관검열을 역임하고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정자가 되어 경연 전경(典經)과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였다. 저작으로 승진하였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을해년(1515)에 다시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가 저작·박사를 역임하였으나 언사(言事)에 휘말려 호분위(虎賁衛 : 오위)의 부사정으로 좌천되었다. 곧 부수찬, 지제교에 발탁되어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고 다시 교리에 승진하였다. 몇 년 동안 정언·수찬·교리가 된 것이 세 번이고 이조정랑이 두 번, 병조정랑과 사헌부지평이 네 번이니 모두 청선(淸選)이었다. 신사년(1521)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가 갑신년(1524)에 거상을 끝내고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옮겼다. 을유년(1525)에 천거되어 의정부검상에 제수되고 곧 사인에 승진하고 시강원보덕에 승진하였다. 인종이 동궁에 계실 때에 학문이 고명하고 춘방의 좌우는 모두 당시의 명망이 지극한 사람들이었는데 공은 강설이 상세하여 막힘이 없고 말소리가 맑고 우렁차니 인종께서 매번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서연에서 시비가 있는 말은 반드시 매일 기록하여 아뢰니 중종께서 공을 보시고 권면하여 훈계하시며 “보도(輔導)하는 직책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셨다. 무술년(1528)에 다시 사인에 임명되고 곧 사헌부집의로 발탁되었다가 홍문관전한으로 옮겼다.
일찍이 경연자리에서 당시 재상의 탐욕하고 더러운 실상을 일일이 논하였는데 왕께서 그 성명을 캐묻자 숨김없이 지적하여 비판하니 안팎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정해년(1527, 중종 22)에 직제학에 승진하였다. 공은 홍문관에 오래 있으며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하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뜻과 이치를 분석하여 밝히고 표리가 환하게 통하니 당시의 강관들이 모두 자기는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4월에 소간공의 상을 당하였고 기축년(1529)에 탈상하여 장악원정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이산군(理山郡)에서 오랑캐를 잡았는데 실제와 어긋나는 일이 있어 억울한 죄인들이 옥에 가득 차게 되었다. 장차 관리를 보내 조사하여 다스리려고 하나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공을 천거해서 가서 다스리도록 하여 그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니 당시의 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경인년(1530, 중종 25)에 다시 사인으로서 종부시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왕께서 전교하시기를 “아무개는 매우 강직하고 사리에 밝아서 반드시 종친들의 위법을 잘 바로잡을 것이므로 임명한다.”라고 하시니 종실들이 두려워서 위축되어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였다. 가을에 다시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이조판서 장순손(張順孫)공이 새로 인사권을 잡았는데 공의 강직함을 싫어하여 이에 사섬시정으로 보내고자 하니 이름 있는 재상 한사람이 가서 책망하며 “아무개는 마땅히 대간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외직으로 옮기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장순손이 크게 성내며 곧바로 가서 왕께 아뢰기를 “아무개는 청류(淸流)의 사람이라 대간의 자리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 까닭에 다른 자리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론이 이 때문에 저를 비난하기에 감히 와서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홍문관도 곧바로 상소를 올려 음험하고 사특한 실상을 진달하였으나 왕께서는 모두 그대로 두어 불문에 부치셨다. 사람들이 혹 공에게 사퇴하고 피하거나 또 장순손에게 가서 해명하라고 권하자 공은 “지난번에 청류로서 해를 입은 사람은 모두 나의 벗들이지만 내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사퇴하여 피하며 또 왜 찾아보겠는가?”라고 하며 뜻을 더욱 엄하게 가지고 끊어버려 돌아보지 않았다.
정현왕후(貞顯王后 : 중종의 왕비 윤씨)의 상에 재정이 많이 부족하여 삼도감(三都監 : 빈전도감·국장도감·산릉도감)에서 쓰는 물건을 모두 시장에서 마련하였는데 값을 치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과 한탄이 심하였다. 공은 이에 아뢰어서 그 값을 모두 치러주었다. 종부시와 사복시정을 역임하고 보덕으로 옮겼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귀양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와 점차 권력을 잡게 되자 경박하고 공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로가 왕실과 혼인을 맺었다고 하여 의지하고 친교를 맺어 서로 붕당이 되었다. 공이 집의가 되었을 때 당시 양사에서 번갈아 폐단을 진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안에 자기를 좇는 사람은 등용하고 자기의 뜻과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는 말이 있었다. 대사간 심언광(沈彦光)이 보고는 화를 내며 “이때에 어찌 이러한 습속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공은 “요즘의 큰 걱정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언광은 바야흐로 함께 붙어 모이는 무리였기 때문에 그 실상을 건드리는 것을 미워하고 법망에 얽어매어 반드시 멀리 귀양을 보내려고 하였다. 중종께서 마침내 죄를 감하여 다만 그 직책을 빼앗았으나 공은 편안한 모양으로 개의치 않았다. 처자를 거느리고 예산의 시골집에 물러나 거주하며 농사일을 밝히고 즐거워하면서 종신하려는 듯이 하였다.
정유년(1537, 중종 32) 겨울에 삼흉이 죄를 받자 참소를 당해 해를 입은 여러 선비들이 모두 누명을 벗었으며, 무술년(1538) 봄에 공도 또한 봉상시부정으로 소환되었고 다시 군자감정과 군기시정으로 옮겼다. 5월에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여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병조참지로 옮겼다. 기해년(1539)에 동지사로 북경에 갔는데 종계주청사(宗系奏請使)와 함께 떠났다. 중간에 왕께서 글을 내려 “경들의 사신 임무는 비록 다르지만 마땅히 서로 익숙하게 알아서 만일 한 사람이 사고가 있으면 대신 일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북경에 도착해서 주청사가 병으로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이 홀로 예부(禮部)에 나아가서, 분명히 해명하고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말의 뜻이 진실하고 간곡하니 이에 재가를 얻었다. 사신이 돌아오고 상을 내리는데 끝내 공에게는 상이 미치지 않았으나 공은 한마디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애당초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였다. 사람들이 이래서 더욱 공을 칭찬하고 저 사람이 양보하지 않은 것을 비웃었다. 공이 장차 돌아올 적에 병으로 하직인사를 못하게 되자 젊은 사람에게 부축을 시키고 북쪽에 다섯 번 절을 하고 나오니 중국 사람들이 예를 안다고 탄복하였다.
경자년(1540, 중종 35)에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진하여 예조참판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공은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이후로 병이 날로 심해져서, 말 타고 내려갈 수 없다고 사직하니 다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영남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며 송사가 많은 것이 팔도에서 제일이니 관찰사를 임명함에 반드시 조정에서 중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는데 소간공과 공의 형제가 이어서 관찰사가 되었으니 비록 공은 부임하지 않았으나 세상에서 모두 부러워하였다. 신축년(1541)에 세자우부빈객을 겸하였다가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마침 흉년을 맞아 온 지역이 근심하는 소리였는데 공은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고 보살피니 목숨을 보전하여 산 사람이 많았다. 공은 지친 나머지 옛 병이 다시 생겨 바로 동지중추부사로 체직되어 수레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언관이 직접 밀부(密符 : 감사·병사·수사 등의 지방관에게 주는 신표)를 바치지 않았다고 논하여 파직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542)에 특별히 자헌대부에 승진하여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인재를 뽑아 관직을 줌에 공평하였고 체계 있게 군정을 다스렸다. 계묘년(1543) 가을에 병조에서 해면되기를 청하여 이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갑진년(1544)에 예조판서로 옮기고 지의금부사를 겸임하였다. 겨울에 중종이 승하하자 빈전도감제조가 되어 창졸간에 상을 치르는데 예에 따라 어긋남이 없었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이어 승하하자 공은 산릉의 일을 감독하였는데 직접 작업을 다스리며 장례에 성심을 다하였다.
나이 어리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방자하게 괴이한 의논을 하여 그 기염이 성하고 서로 칭찬하며 추천하였다. 공은 홀로 소리 높여 그들을 힐책하였고 또 “명분이 매우 중한데 곽순(郭珣)같은 천한 출신이 어떻게 시종의 반열에 흠을 내는 데에 이르렀는가?”라고 말하였다. 언관에서 순(珣)의 입장에 있던 자가 극력 배척하여 끝내 중간에 파직되고 오랫동안 복직되지 못하였다. 금상이 즉위한 초기에 순의 무리들이 과연 무거운 죄를 입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에 감복하였다.
조문하고 책봉하는 중국사신이 오자 공은 공조판서로서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접대하는 것이 의젓하고 온화하여 예에 합당하니 중국 사신들이 여러 차례 칭찬하였다. 병오년(1546, 명종 1)에 위사원종공신이 되고 품계가 정헌대부로 승진하여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였으며 두 임금의 실록을 감수하였다. 가을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하고 곧 좌참찬에 올라 동지경연사와 도총부도총관을 겸임하였다. 경술년(1550)에 실록을 전주(全州)의 사고(史庫)에 받들어 모시는데 특별히 강가에서 송별연회를 베풀어 대접해 주셨다. 신해년(1551)에 다시 양종(兩宗 : 교종과 선종)과 선과(禪科 : 승려의 시험제도)를 만들자 공은 즉시 수천자의 상소를 엮어 이단의 해악이 크게 새로운 정치에 허물이 되는 것을 심히 비판하고 정차 편전의 문을 두드려 힘써 간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정승들이 상소의 말이 너무 과격하여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체모가 아니라고 완강히 말려니 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중전이 일찍이 친정부모를 뵙기 위해 본가에 행차를 나가는데 이날 바람이 몹시 심하였다. 공은 경연에 있다가 극력 아뢰어 “궁한 마을의 민가는 국모가 임어할 곳이 아닙니다. 친정 사람 중에도 또한 아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은혜가 내리는 것을 바라서 이러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천재지변이 명백하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강직하였다. 의정(議政) 심연원(沈連源)이 국구(國舅)의 아버지로서 마침 입시하였었는데 두려워 떨면서 숨을 죽였고 좌우에 듣는 사람들이 공을 위태롭게 여겼다.
을묘년(1555, 명종 10)에 나이가 많아 치사(致仕)하니 왕께서 전교하기를 “경은 세 임금을 거친 오래된 신하이고 또 기력이 아직 건강한데 어찌하여 갑자기 물러나 쉴 수 있겠는가?”하시고 유임을 권하며 하락하지 않으셨다. 공은 의정부에 있은 지 12년이니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참여하여 결정하는 것이 경우에 모두 합당하여 조야가 깊이 의지하였다. 정사년(1557) 6월 17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하니 춘추 72세였다.
처음 병이 들어서부터 별세할 때까지 거듭하여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었고 한 마디도 집안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병이 위독해지자 술과 고기를 하사하셨는데 공은 부축 받고 일어나 관대를 하고, 먼저 맛을 보고 또 집안에 나눠주어 임금이 하사하신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으니 정신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부음이 보고 되자 왕께서는 매우 슬퍼하시어 2일간 조회를 보지 않으셨고 부조를 많이 하시고 다음날 또 채소와 과일 등의 소물(素物)을 하사하셨으니 특별한 은혜였다.
공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평소에 수양을 하여 행동하고 말하는데 반드시 법도를 따랐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극진히 하였다. 친구에게 독실하게 하고 친척에게 화목하여 궁핍한 사람을 돕고 보살피는 일은 모두 여분의 일이었다. 남과 교유함에 승낙을 신중히 하고 진실하여 의리가 있었다. 비록 올바름을 지키고 사악함을 미워하였으나 관용을 베풀어 잘 용서하였다. 남을 평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사화를 겪으면서도 홀로 법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담백하게 스스로 절조를 지켜서 오래도록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집에는 남은 재물이 없었다. 거처하는 방을 정용(靜容)이라 이름하고는,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일찍이 게으른 모양이 없었다. 항상 자제들에게 “내 평생에 어찌 남보다 나은 것이 있겠느냐마는 다만 홀로 있을 때 나 자신을 속이지 않았고 남에 대해 숨긴 일이 없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만년에 종남산(終南山 : 남산)기슭에 집을 짓고 양쪽에 서적을 쌓아놓고, 꽃을 기르고 나무를 심으며 초연히 속세를 벗어날 생각을 가지고 마치 세상을 경영할 뜻이 없는 듯 하였다.
강원에서 시강할 때에는 언론의 뜻이 뛰어나고 만일 잘못된 정사가 있으면 면전에서 질책하여 회피하지 않았다. 강계(薑桂 : 생강과 계피처럼 오래될수록 더욱 매워짐)한 성품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한결같아 여러 번 좌절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진정 천지의 순수하고 강직한 기운을 받아서 옛사람의 강직한 유풍을 지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진사 신제담(辛悌聃)의 딸에게 장가갔다. 역시 영산(靈山)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수문전대제학 인손(引孫)의 손자이다.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이 바로 중신(重臣)이니 계묘년(1543, 중종 38)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사복시주부이고 차남 의신(毅臣)은 의영고령이며 딸은 경상도관찰사 이감(李戡)에게 출가하였다. 주부는 현감 이옹(李壅)의 딸을 맞아 아들 증(拯)을 낳았고 의영고령은 현감 한팽조(韓彭祖)의 딸을 맞아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지(持), 다음은 택(擇), 다음은 공(拱)이다. 관찰사는 아들딸을 하나씩 두었으니 아들 성헌(成憲)은 종실 광원수(廣原守)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딸은 선비 윤유후(尹裕後)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해 8월 22일에 양주 관아 북쪽 천보산(天寶山)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을 좇은 것이다.
내가 젊어서 북학(北學 : 서울에 있던 5학중 하나)에 있을 때 동년배 중에서 공의 형제를 보니 마치 들판의 학이 닭의 무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 마침내 서로 허여하고 막역한 벗이 되었다. 옛날 갑오년(1534)에 내가 명나라에 사신을 갔는데 사균(士鈞)이 먼저 북경에 갔다가 세상을 떠나서 칠참(七站 : 황해도 소재의 역참)의 노중에서 돌아가는 영구에 곡을 하였는데 지금 공을 위해 또 이글을 지으니 두 형제의 풍류가 이에 다하였구나. 내가 어찌 옛 교분을 생각하며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명하노니,

아! 공이 생장한 곳은 시례(詩禮 : 아버지가 자식을 교육함)의 가문,
판서공이 부친이고 관찰사공이 형이라네.
가정교육은 심히 올바르고 효도와 공경을 숭상하였으며
학문은 성취함이 있어 높은 경지에 나아가 깨달았네.
학관에서는 논의가 빼어났으며 과거에서 대책을 올리더니
뛰어난 재주 밝게 드날려 관각(館閣 : 홍문관·예문관)에서 근무하였네.
세 임금을 섬김에 노엽게 할지언정 굽히지 않고 강직하니
외로운 충성과 굳은 절개는 옛날에도 또한 비길 자 드물리라.
백번 단련된 강철은 끝내 손에 휘감기지 않았고
대나무·잣나무 같은 지조는 바람과 서리에도 변하지 않았네.
한나라에 급암(汲黯)이 있어 군주의 잘못을 고치고 모자람을 보충해 주었으며
당나라가 한휴(韓休)를 등용하니 군주는 수척해지고 백성들은 살이 쪘구나.
곧 정승에 올라 의정부에 10년을 있더니
하늘은 어찌 애써 남겨두지 않고 빨리 빼앗아 가는가?
거울 하나(당태종이 위징의 죽음을 애도한 말) 없어지니 백 사람으로도 바꿀 수 없구나.
울창한 저 천보산(天寶山)에 상서로운 기운이 쌓여 있으니
공의 영혼이 이곳에 있네, 지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공경하라.

가정 39년(1560, 명종 15) 10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

슬프구나! 이 사람과 황천으로 헤어졌구나.
머리흰 늙은이가 눈물 뿌리며 명을 새로이 쓰노라.
세 조정에서의 사업은 마땅히 역사에 남겠지만
한 조각 비석에 어찌 정을 다할 수 있으리?
혜초가 꺾어지고 난초가 시들어도 향기는 없어지지 않으니
용이 죽고 범이 가버려도 자취는 오히려 분명하네.
지금 그대 아드님 만나 밤을 새워 이야기하니
마주 대함에 옛 모습과 같아 다름이 없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