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신도비(全溪大院君神道碑)  
 
 
     
  전계대원군 신도비

(전액) 어필대원군지비
유명조선국 전계대원군 신도비명 병서
숭록대부 행 병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 실록사 신 조두순은 명을 받들어 글을 짓다.

기유년(헌종 15, 1849년) 6월 9일 우리 주상전하께서 태모의 뜻을 받들어 들어와 대통을 계승하여 종묘와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되셨다. 이에 자신의 출신을 살펴 상신과 예신에게 물어 친아버지를 추봉하여 전계대원군으로 삼고, 축호와 사식을 한결같이 송나라 복왕과 수왕 및 본조 덕흥대원군의 전례에 따르고 추호의 지나침도 없게 하였으며 또 묘도도 닦지 않았다 하여 닦도록 하였다. 아팎의 여러 관리들이 분주히 일을 일으켜 이듬해 원년에 일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이에 태사신인 두순에게 명하여 묘도에 세울 비명을 기술하는 일을 맡겼다. 황송하고 두려워 감히 사양치 못하고, 삼가 대내에서 내리신 행록에 의존하여 다음과 같이 찬한다.
대원군의 성은 이요 휘는 광이며 자는 창강이니, 은언군 휘 인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러니 장헌세자의 손자요, 영조대왕의 증손인 것이다. 어머니는 전산군부인 이씨이다. 대원군은 을사년(정조 9, 1785년) 3월 21일 경오일에 태어나 신축년(헌종 7, 1841년) 11월 2일에 사저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57세요, 양주 신혈면 은언군의 묘 아래인 해좌원에 장사지냈다.
대원군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타고났고 인후함이 성품을 이뤘는데, 자고 먹을 때에나 놀이를 할 때나 항상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갔을 때에 큰 비가 내려 흙탕물이 방안으로 밀어 닥쳤는데 집안에 하인이라고는 창두 한 사람 뿐이었다. 먼저 은언군을 모셔 언덕 위에 내려놓으니 대원군이 울면서 부르짖기를 형들도 구해달라 하였는데 그 때 나이 겨우 세살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이르자 용모가 의젓하고 순수하며 돈독하고 온화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은언군이 매양 임금을 연모하여 탄식하고 가슴이 메일 때면, 곧잘 부드러운 목소리와 귀여운 얼굴빛을 지어 새새끼를 희롱하거나 빙빙 돌아 소매를 펼치는 모습을 지었는데, 마음으로는 울적함을 풀어드리고 일시라도 즐겁게 해드리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던 것이다.
정조께서 승하하시자 은언군은 가슴이 메이도록 울부짖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고하기를, “어른께서 대행대왕의 뒤를 따르려 하시니 소자들도 마땅히 따라야 하겠습니다. 다만 당에는 노모가 계시나 감히 안후를 묻지 못한 지 이제 15년이나 되었습니다. 어찌 유질지우를 거꾸로는 생각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이윽고 신유년(순조 1, 1801년)의 화가 닥쳐 곧 형제에게 위리안치의 법률이 내려졌다. 당시 중형이 심한 열병을 앓았으나 곁에 부축해 줄 사람이 없으니 끝까지 충심을 다하여 봉양하였으나 끝내 피곤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부친상을 당하자 모부인과 함께 살았는데 오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니 막대처럼 말라 거의 온전히 못할 지경이었으나, 후상과 전상의 차이가 없이 하였다. 임오년에 우리 순조께서 이임오년이 다시 돌아왔다 하여 특별히 완전히 풀어주었다. 그리하여 윤월에 처음으로 유배지인 섬에서 관례를 행하였다.
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는 학생 최수창의 따님이고, 1남 원경은 일찍 죽어서 장가들지 못하였다. 욱은 이씨 소생인데 ▨평군에 봉해졌다. 용성부대부인 용담염씨는 영의정으로 증직된 성화의 따님인데 이 분이 우리 주상전하를 낳으셨는데 서차는 세 번째이시다.
신이 생각건대 대원군께서는 왕실의 의친이면서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여 험하고 두렵고 걱정되는 일을 두루 겪으셨다. 그러나 순조의 천지와 같은 재조은을 받들어 ~ 5자결 ~ 다시 일월의 빛을 본 지 20년이었다. 그러나 행실이 순박하고 돈독하여 경사를 기르고 복록을 쌓아 우리 성상께서 용흥하실 운세를 높이 피어 내신 것이다. 비록 역사기록에 실린 대횡의 운세는 오히려 사냥수레로 증손을 맞이하는 것에서 으뜸이니 천년에 한 번 있을 성사는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여긴다. 아! 이 어찌 천운이 아니랴마는 우리 태모께서 위태로울 때에 다달아 대책을 정하여 안정을 이루었고 온 누리가 매인 바가 있게 하였으며, 태평성대를 열고 믿고 따르게 한 행위에 하늘과 사람이 의지할 바가 있게 한 것이다. 이는 길이 천하 만세에 전해지고 다함이 없을 것이로다. 아! 훌륭하시도다. 명에 이른다.

공경스러운 대원군은 장헌의 손자인데,
영명한 아드님 두셔 그 근원도 깊었다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힘써 노력하며 기르고 감쌌는데,
어려울수록 더욱 굳건했으며 선이라면 반드시 실천하셨지.
순조께선 널리 펴셔서 선지를 본받으셨는데,
다만 온전히 풀어주셨을 뿐 아니라 실은 광영을 열어주심이었네.
광영을 열어주심 끝간 데 없어 성인이 들어가 계승하니,
천만년에 경명이 비로소 응결되었도다.
예가 엄숙함에 정을 억제함은 옛날부터 준례가 있었나니,
그 준례 어떠했는가,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지.
높다란 아름다운 성은 이에 다스려지고 이에 존숭되었나니,
정녕코 길이 또 견고하게 전해져 자손의 번연을 가져오리도다.

숭정기원후 4 신해년(철종 2, 1851년) 8월 일에 세우다.

비가 이루어진 6년 뒤에 포천 해룡산 선단리 임좌원에 이장하고 완양부대부인을 이장하여 합부하였는데 병진 3월 26일이었다. 현각은 옛것으로 쓰기로 하고 두순에게 그 사유를 돌의 뒷면에 추록하라고 명하셨다.
중궁전하 안동 김씨는 영돈녕부사 영은부원군 문근의 따님이고, 책례는 신해년에 있었다.
비면에 미처 실리지 않는 바이기에 아울러 기록하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