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지대선사지인묘지명(廣智大禪師之印墓誌銘)  
 
 
     
  해동(海東) 광지대선사(廣智大禪師) 묘지명
금(大金) 정풍(正豊) 3년(의종 12, 1158) 가을에 광지대선사가 돌아가셨다. 그 문인(門人)이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요청이 매우 간절하므로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글을 짓는다.
스님의 이름은 지인(之印)이고, 자는 각로(覺老)이며, 스스로 호를 영원수(靈源叟)라고 지었다. 아버지는 성조(聖祖) 예종(睿宗)이고, 어머니 은씨(殷氏)는 후궁이었는데, 거란(契丹) 건통(乾統) 임오년(숙종 7, 1102) 여름 6월 26일에 집에서 탄생하였다. 스님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냄새나는 채소와 고기를 싫어하였다. 생김새와 음성이 예종과 똑같았으므로 예종이 가장 귀여워하였다. 9세 때 왕명으로 혜소국사(慧炤國師)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선나법(禪那法, 禪法)을 배웠는데, 도를 닦는 기틀이 어린 나이에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마치 타고난 성품과 같았다.
15세에 승려의 과거[佛選]에 급제하고, 기해년(예종 14, 1119)에 조서를 내려 법주사(法住寺)의 주지로 삼았다. 정미년(인종 5, 1127)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는데, 실로 인종(仁宗)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해이다. 임자년(인종 10, 1132) 가을에는 선사(禪師)가 되었다. 스님이 이미 높은 승계를 받았으나, 번화한 것을 싫어하여 임금에게 글을 올려 주지의 직무를 피하여 숲 그늘에서 지낼 수 있도록 청하였다. 임금은 “도가 있는 곳이라면 저자거리도 곧 청산(靑山)일 것입니다.”라고 하여 그 청을 거절하였다.
지금의 임금<毅宗>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정묘년(의종 1, 1147)에 특별히 비묵(批墨)을 내려 대선사(大禪師)를 더하여 주었다. 기사년(의종 3, 1149)에 임금이 직접 글을 써서 광지(廣智)라는 법호를 주니, 총림(叢林)의 승려[衲子]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스님은 “임금의 총애를 탐내면서 사는 것은 중의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지륵사(智勒寺)로 돌아가서 지내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은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을해년(의종 9, 1155)에 영평(鈴平)의 금강사(金剛寺)가 서울과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라고 하여 그 곳에 가서 머물렀다. 임금이 항상 중사(中使)를 보내 음식 등을 보내며 문안하는 일을 하루도 멈추는 적이 없었다. 스님은 그 산이 얕은 것을 아쉬워하여, 병자년(의종 10, 1156) 봄에 주계현(朱溪縣)상산(裳山)에 있는 자그마한 절을 가려서 곧 그 곳으로 물러가고자 하였다. 임금이 알고 근신(近臣) 서순(徐淳)을 보내 굳게 만류하면서 더욱 우대하고 설득하였다. 스님은 이에 몇 달을 머무르다가 여름 5월이 되자 다시 여러 차례 글을 올리니, 마침내 그 청이 받아들여졌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조서를 내려 서울로 오라고 하였지만,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축년(의종 11, 1157)에 임금이 또 근신을 보내어 부르니, 사양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궁궐로 나아갔다. 수덕궁(壽德宮) 대평정(大平亭)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는데, 임금이 몸소 참석하여 자혜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총애하며 보살피는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법주사에서부터 지륵사에 이르기까지의 5년 동안 도량(道場)에 앉아 들려준 중요한 말은 자세하게 별록(別錄)에 실려 있다. 스님의 도량(度量)과 지식은 크고 깊어서 선학(禪學) 이외에 교관(敎觀)에도 해박하였다. 또 글을 잘 지었는데 특히 고체시(古體詩)에 뛰어났다. 평생 사람들을 대접하면서 비록 지극히 미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꼭 같은 예의로 대하여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비록 먼 나라나 외진 곳의 진귀한 보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면 바로 주어버리니, ▨ 거처하는 방장(方丈)은 텅 빈 채 몇 가지 불경 서적과 그림만을 두고 항상 이를 감상하고는 하였다. 남은 재산을 다 털어서 쌍봉(雙峰)과 지륵 두 사찰에서 대장경을 간행하여 유포시키니, 그 공덕은 다 적을 수가 없다.
무인년(의종 12, 1158) 7월에 갑자기 다리에 병이 났다. 8월 4일 병이 더욱 심해지자 머리를 깎고 목욕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게(偈)를 지었다. 돌아가시려고 할 때 “오늘이 며칠이오”하고 물으니, 제자가 “진일(辰日)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스님이 말하기를, “진일과 사일(巳日)은 세속에서 꺼리는 날이니, 나도 마땅히 피하여야겠소.”라고 하였다. 12일이 되자 또 게를 지어 대중에게 보였다.
내가 태어난 지 57년 되었으나
근본으로 돌아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네.
본성이 머무는 곳은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세계에 두루 있으니
여관과 같이 일시 머물다 가는 곳에 어찌 몸을 맡기겠는가.
게를 마치자 곧바로 먼 길을 떠나가니, 널[柩]을 영평산(鈴平山)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향년 57세이고, 법랍은 48년이다. 이 해 11월 28일에 유골을 조양산(朝陽山) 동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조계(曹溪)의 거울 뒷면은 한 점 티끌이 없는데
그 오묘하고 밝은 경지를 터득한 자, 능히 몇 명이나 있으랴.
아, 우리 광지 스님만이 오묘한 진리[玄眞]에 가깝게 합하였으니
총림(叢林)이 우러러보고 별과 같이 받들어 모시네.
세상에 태어나니 상서로움은 오색 빛 기린과 같았으나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고자 급하게 허물을 벗으셨네.
제호(醍醐)같은 불법의 묘미도 맛을 잃고, 치자꽃 향기도 봄과 함께 시드니
세월은 점점 흘러만 가고 초목은 더부룩하게 우거지네.
그분의 위대한 자취 흩어지고 사라질까 두려워하여
이에 묘지명을 지어서 단단한 돌에 새기네.
문림랑 시대묘승 겸 한림원(文林郞 試大廟丞 兼 翰林院) 임종비(林宗庇)가 짓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