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묘지명(閔瑛墓誌銘)  
 
 
     
  군은 민(閔)이 성이고, 영(瑛)이 그 이름이며, 본관은 황려현(黃驪縣)이다. 제릉서령(諸陵署令)으로 관직을 그만 두었으나, 행도재고부사(行都齋庫副使)로 검교대자소보(檢校大子少保)가 더해졌다. 증조 가거(可擧)는 상서우복야 겸 대자소사(尙書右僕射 兼 大子少師)이고, 조부 창경(昌京)은 위위경 지삼사사(衛尉卿 知三司事)이며, 아버지 효후(孝侯)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다. 어머니 낙랑군대부인 김씨(樂浪郡大夫人 金氏)는 경주(慶州) 출신으로, 외조 상빈(尙賓)은 국자제주 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 翰林侍講學士)이다.
군은 사람됨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과 말을 달려 격구(擊毬)하는 것을 좋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아버지 효후가 동계병마판관(東界兵馬判官)이 되어 적국[女眞]과 싸우다 사망하자, 이를 한스럽게 여겨 복수를 하여 아버지의 욕됨을 갚으려고 하였다.
마침 예종(睿宗)이 동쪽 오랑캐를 정벌하는 기회를 만나자, 간청하여 신기군(神騎軍)이 되었다. 갑신년(숙종 9, 1104), 정해년(예종 2, 1107), 무자년(예종 3, 1108), 기축년(예종 4, 1109)의 4년 동안 출전하였는데, 매번 선봉이 되어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賊)을 사로잡고 적(敵)을 물리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어 장연현(長淵縣)의 수령이 되어 나가자 청렴하고 깨끗하게 공무를 받들었으므로, 안부(按部, 按廉使)가 군(郡)을 잘 다스린 일로 조정에 보고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었다.
회릉(懷陵), 대관(大官), 내고(內庫), 장야(掌冶)의 관직을 거치면서, 모두 직책을 잘 수행했다는 평판이 있었다. 차합문지후(借閤門祗候)로서 관례에 따라 영주방어사(靈州防禦使)에 임명되었으며, 임기가 차자 서울로 돌아와 대부·사재주부(大府·司宰主簿), 군기승(軍器丞), 제릉서령(諸陵署令), 도재부사(都齋副使)가 되었다.
아, 6척(尺)의 당당한 몸으로 백▨(白玉?)처럼 한 점의 흠도 없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말단 벼슬에 머물고 말았도다. 그러나 천성이 편안하고 담백하여 낮은 관직과 박한 봉급에도 초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훌륭하지 아니한가.
형인 기거주(起居注) 민수(閔脩)가 일찍 세상을 뜨고, 형제 자매 대여섯 명도 차례로 세상을 버리자, 형제 자매의 자식을 돌보기를 모두 자기 자식처럼 하였다. 효성과 근실함으로 어머니를 섬기니, 어머니의 향년은 94세이다.
군은 공부상서(工部尙書) 홍덕성(洪德成)의 막내아들인 호부영사동정(戶部令史同正) 홍뢰(洪賴)의 딸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이함(利諴)은 등사랑 직사관(登仕郞 直史館)이고, 둘째 광문(光文)은 등사랑 양온서령(登仕郞 良醞署令)이며, 셋째 ▨화(▨和)는 지공주사판관(知公州事判官)으로 사망하였으며, 막내 ▨수(▨秀)는 양온사동정(良醞史同正)이다. 1녀는 형부낭중(刑部郞中) 김구부(金龜符)의 아들인 거실(居實)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내시 비서성교서랑(內侍 秘書省校書郞)이다.
군은 갑자기 병이 들어 경오년(의종 4, 1150) 11월 19일에 사망하니, 나이 76세이다. 임신년(의종 6, 1152) 11월 12일 임인일에 개성부(開城府) 안에 있는 해안사(海晏寺) 북쪽 기슭에 유골을 장례지냈다.
명(銘)하여 이른다.
날래고 용감하며, 문에 뛰어나고 무예도 뛰어났도다.
선행을 하여 복이 쌓여 있으니 그 자손이 지극히 창성하리로다.
금(大金) 천덕(天德) 4년 임신년(의종 6, 1152) 11월 일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 김우번(金于蕃)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