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화사비(玄化寺碑)  
 
 
     
  영취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 <왕이 제액을 쓰다> [제액(題額)]

유송 고려국 영취산 신창대자은현화사비 병서 (송의 고려국 영취산에 대자은현화사를 새로 지은 것을 기념하는 비명과 서문)
숭문보덕공신 한림학사승지 금자흥록대부 좌산기상시 지제고 수사관사 상주국 여남현개국자 식읍오백호(崇文輔德功臣 翰林學士承旨 金紫興祿大夫 左散騎常侍 知制誥 修史館事 上柱國 汝南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인 신(臣) 주저(周佇)가 왕명[宣]을 받들어 짓다.
추충진절위사공신 흥록대부 겸리부상서 참지정사 상주국 제양현개국자 식읍오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 興祿大夫 兼吏部尙書 參知政事 上柱國 濟陽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인 신(臣) 채충순(蔡忠順)이 왕명[宣]을 받들어 쓰다.
신은 천지가 생겨난 이래 성명(聖明)하신 임금으로는 오직 요임금[唐堯]과 순임금[虞舜]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임금께서는 지극한 어짊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셨고, 순임금께서는 크신 효성으로써 나라를 교화하셨기 때문에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고 역사책에 빛나고 계십니다. 이후에 중국의 황제는 물론 주변 국가의 제후왕 등 모든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들로서 누가 요임금과 순임금의 자취를 잇고 유풍을 떨쳐서 백성을 교화하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어짊을 닦되 어짊이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였고, 효성을 행하되 효성이 온전하지 못하여서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일으킴에 있어 처음과 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고서 대부분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다스림이 심오하여서 계승하기 어렵고, 어짊과 효성의 도가 광대하여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본받으면서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우리 신성하신 임금님 뿐이실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봉양하려는 마음을 극진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빠뜨림이 없었고, 왕위에 오르신 후에는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효도를 다하지 못함을 늘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추존의 예를 거행하고 종묘에 모시는 의식을 갖춤으로써 예법에 정해진 절차 이미 모두 다 행하였지만 그래도 성상의 효심에는 부족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에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다하여 추모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취하고 착한 일을 행하고 참된 가르침에 참여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사찰을 짓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을 천도하시었습니다. 이로써 (부모님의 영혼이) 정토에 갈 수 있는 공덕이 늘어나고 하루 빨리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게 하여 아버님과 어머님의 자애로운 사람에 보답하고 부처님들의 서원을 이루게 하시었으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의 아버님이신 안종효의대왕(安宗孝懿大王)께서는 태조의 친아들로서 동방의 왕실 출신이신데, 예(禮)·악(樂)·시(詩)·서(書) 등에 마음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시었으며 온화하고 겸손하신 태도를 몸에 갖추셨으니 진실로 왕자(王者)의 재능을 가지고서 고인(古人)의 행동을 실천하셨습니다.
성종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의 말년인 계사년(성종 12, 993) 겨울에 못된 거란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 영토에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을 괴롭히니, 이웃 군대가 가까이 옴에 우리의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서 성종대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군사들을 거느리고 강한 적들을 물리치러 나아가셨습니다. 출발하시기에 앞서 먼저 중추부사급사중(中樞副事給事中)인 최숙(崔肅)을 보내어 (안종대왕에게) “지금 이웃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무리를 인솔하여 그 군대를 물리치러 나아간다. 서울에 혹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그대는 가족들을 이끌고 잠시 남쪽의 안전한 곳으로 가서 이 어려움을 피해 있다가 변방이 조용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행차를 돌려 돌아오라”고 하시고, 내알자감(內謁者監) 고현(高玄)을 선배사(先排使)로 삼아서 어조(御槽) 안마(鞍馬) 의복(衣服) 비단(匹帛) 주식(酒食) 은기(銀器) 등과 그곳에서 사용할 토지와 저택, 노비들을 하사하시고 호위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안종대왕께서는) 곧바로 사주(泗州)에 이르셨는데, 성상께서는 함께 모시고 가면서 문안을 더욱 지성으로 하시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서 (안종대왕께서는) 갑자기 병이 드셔서 낫지 못하시고 통화(統和 : 거란 聖宗의 연호, 983~1011까지 사용) 14년 병신년(성종 15, 996) 7월 초7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시었습니다. 얼마 후에 장례치를 땅을 점쳤는데, 사주(泗州)의 땅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성종대왕께서는 곧 군사를 돌이키시고 다시 평안을 되찾으셨습니다. 서로 잘 지내기로 하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고, 이로서 군인과 백성들이 다시 근심과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안종대왕을) 다시 서울로 맞이할 겨를이 없다가 갑자기 돌아가심을 듣게 되었으니, 작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카로서 애통함을 다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을 갖추고 조정의 조회를 쉬는 예를 행하였으며, 장례에 부조하는 물건을 정해진 제도 이상으로 하였고 (임금께서) 슬퍼하시는 마음은 잠시도 그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상에게 본궁으로 돌아와 머무르도록 하면서 깊이 위로해 주셨고, 이후의 돌봄도 매우 간절하셨습니다. 성상의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께서는 대종대왕(戴宗大王)의 따님이고 성종대왕의 둘째 누님이셨습니다. 왕실의 후예이고 종실 출신이셨지만 검소함은 대련(大練)을 따랐고, 아름다움은 금련(金蓮)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안종대왕과는) 난새와 봉황의 짝처럼 서로 잘 어울리고, 거문고와 비파의 소리처럼 서로 조화되었습니다. 여공(女功)과 부도(婦道)는 여유있게 하였고, 여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덕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해로하지 못하고 안종대왕에 앞서서 돌아가셨습니다. 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의 연호, 990~994까지 사용) 4년(성종 12, 993) 늦봄에 갑자기 병에 들자 성종대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병을 물으시고 아침저녁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명의를 보내어 거듭 치료하게 하고, 좋은 약초를 보내어 달여 마시게 하였으며, 또한 왕실의 보물을 사찰에 희사하고 낫기를 빌었습니다. 하지만 수명이 길지 못하여 기도의 효험도 없이 그해 3월 19일에 궁궐의 보화궁(寶華宮)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성종대왕께서는 지친(至親)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마음을 크게 애통해 하시며 '이미 주어진 수명을 다하여 편안히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누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목종대왕께서 그때에 태자로 있었는데 감호를 맡게 하여 삼사청(三司廳)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諸宮)의 비빈(嬪妃)과 문무양반들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 앞에서 발상(發喪)하게 하였습니다. (상례 기간 동안) 아침과 오후에 음식을 올릴 때에는 늘 직접 참여하셔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곧 재상을 시켜 책문(冊文)을 올려 시호를 헌정왕후(獻貞王后)로 하였고 또 태복감(太卜監)에게 명하여 땅을 골라 장례를 치르게 하였는데 과연 서울 간방(艮方 : 동북쪽 방향)에 길지를 얻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능호는 원릉(元陵)이며, 장례를 치를 때에는 재상과 근신들을 모두 차출하여 도감(都監)을 만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셔서는 책문(冊文)을 올려 아버님을 안종헌경효의대왕(安宗憲景孝懿大王)이라고 하고 어머님을 효숙인혜왕태후(孝肅仁惠王太后)라고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어머님의 능은 가까운 곳에 있어 다시 옮길 필요가 없지만 아버님의 효릉(孝陵)은 먼 곳에 있어 계절마다의 제사를 천리 먼 곳에서 지내야 했으므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게 하였으니 능이 왕도(王都)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무덤을 열 때에는 중추부사 추충좌리공신 대중대부 수상서이부시랑 상주국 수안현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中樞副使 推忠佐理功臣 大中大夫 守尙書吏部侍郎 上柱國 守安縣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인 윤징고(尹徵古)를 파견하였고, 영구를 모시고 올 때에는 추충진절위사공신 금자흥록대부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 상주국 청하현개국백 식읍칠백호(推忠盡節衛社功臣 金紫興祿大夫 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 上柱國 淸河縣開國伯 食邑七百戶)인 최침(崔沈)을 여러 차례 보내어 영구를 감호(監護)하게 하였습니다. (영구가) 서울에 도착하자 법가(法駕)를 엄숙하게 갖추고 동쪽 교외에 행차하여 받들어 모시고 임시로 귀법사에 빈소를 마련한 다음 직접 백료들을 이끌고 서울 동북쪽 약 30리에 있는 금신산(金身山)으로 옮겨 장례를 치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곳은) 푸른 까마귀가 길함을 고하고 흰 학이 경사를 알리는 곳으로 그림을 살펴보면 산과 강의 흐름이 만나는 곳이고 점을 쳐보면 음양의 이치가 부합하는 곳이었습니다. 장례 치를 날짜를 정하고 (장례는) 처음과 마찬가지의 의식을 갖추어 행하였습니다. 애통함으로 (성상의) 몸은 잘리고 무너지는 것 같았고, 감동하여 하늘과 땅 역시 슬퍼하였습니다. 천희(天禧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 1017~1021년까지 사용) 원년인 정사년(현종 8, 1017) 4월에 건릉(乾陵)에 장사지냈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에 급하지 않은 일을 중단하고 농사가 바쁘지 않은 때를 살펴 능에서 가까운 영취산(靈鷲山)에 이 절(현화사)을 창건하였습니다. (이곳은) 여러 산봉우리들 사이에 산세가 되돌아 감싸안는 곳으로 서울 가까이에 있으면서 세상의 시끄러움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절을 짓는 일은 대단히 힘들어서 위엄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그 일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시어 추충좌리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삼사사 상주국 청하군개국후 식읍일천호(推忠佐理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傅 守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判三司事 上柱國 淸河郡開國侯 食邑一千戶)인 최사위(崔士威 : 961~1041)를 시켜 별감사(別監使)로 삼았습니다. 재신 최사위는 사람됨이 청렴·공평하고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며, 밖으로는 인자함이 드러나고 안으로는 범행(梵行 : 불교 신자로서 지켜야할 착한 행실)을 닦아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들으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였는데, 명령을 받은 이후 집에서 잠자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며 올바로 되도록 헤아렸으니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이 모두 다 그의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다른 산에서 나무와 돌을 가져오지 않고, 할 일 없는 사람들만을 부린 끝에 세월이 흘러 4년만에 완성하였으니, 법당과 불전은 높고 엄숙하여 (미륵이 계시는) 도솔내원(兜率內院)과 같고 형세는 두루 갖추어져서 (부처님이 머무시던) 급고독원(給孤獨園)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별도로 전각을 만들어 성상 아버님과 어머님의 진영(眞影)을 봉안하게 하였는데, 두 분의 성용(聖容)을 이곳에 봉안함에 이르러서는 예를 갖추어 성상의 아버님에게는 영문(英文), 성상의 어머님에게는 순성(順聖)이라는 휘호(徽號)를 더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님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표를 올려 공사가 끝났음을 아뢰자 난가(鑾駕 : 임금의 수레)가 직접 행차하셨으니 용안(龍顔)에는 즐거움이 가득하였습니다. 두 눈동자[重瞳]로 두루 살펴보시며 마음에 흡족해 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함께 둘러보며 세속세계가 아니라고 찬탄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들르셔서 해가 질 때까지 돌아갈 생각을 잊으시고 계시다가 조(詔)를 내려 ‘이 절을 이끌 사람은 반드시 고승으로 하여야 한다.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대중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라 하시고, 드디어 삼천사(三川寺) 사주(寺主)인 왕사(王師) 도승통(都僧統) 법경(法鏡)에게 이곳에 머무르며 대중을 이끌고 법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 전지(田地) 100경(頃)과 노비 100명, 소와 말, 공구(供具) 등을 시납하여 상주(常住 : 사찰의 일상적인 운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경비)에 충당하게 하였습니다. 사주(寺主)인 왕사 도승통께서는 일승(一乘)의 법장(法匠), 대교(大敎)의 종사(宗師)로서 참된 가르침[眞乘]을 완전하게 깨닫고 불성(佛性)에 두루 통달하여서 후학들을 가르쳐 (불교의) 깊은 가르침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사방의 학도들이 태양처럼 받들며 구름처럼 모여들어 채 1년이 되기 전에 천여 명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성상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 아름다운 곳에 많은 승려들이 모였으니, 참된 가르침을 모은 대장경을 구하고 봉대(蜂臺)의 성사(盛事)를 기록하여야 한다’고 하시고 특별히 사신을 뽑아 사유를 자세히 기록한 후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어 깊고 너른 바다를 건너게 하여 멀리 중국에 조회하여 대장경을 요청하는 표를 올렸습니다. 천자께서 그 표문을 보시고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10행의 한조(漢詔)를 내려 칭찬하시고, 대장경 한 질을 보내어 도와주시었습니다. 그 조(詔)에 이르기를 ‘경(卿)은 큰 나라를 맡아 조상의 공업을 계승하고서 난해(蘭陔)의 봉양을 잃어버림을 생각하고 바람과 나무의 때가 어긋남을 슬퍼하며 사찰을 크게 지어 정성스런 마음을 드러내고 공손하게 표문을 올려 대장경을 요청하였으니 순수한 효성은 아름답게 여길만하고 정성을 다한 것은 칭찬 받을만하다. 바친 물건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특별히 나누어주라고 명령하니 마땅히 (황제의) 총애와 은총을 느끼고 보내는 것을 삼가 받으라. 이제 특별히 경(卿)에게 대장경 한 질과 (대장경을 포장하고 쌀) 상자, 휘장, 금옥(金玉) 등을 보내니 받도록 하라. 비록 좋은 인연을 돕는 것이지만 효성의 감동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불전과 불상에는 안팎으로 향과 등을 공양하고, 대장경의 경전들은 아침저녁으로 독송하는 소리가 늘리게 하라. 복을 심고 좋은 일을 선양하는 것으로 이보다 큰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 성군의 효행의 공덕이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본받으면서 중간에 그침이 없었다고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일이 모두 이루어짐에 좋은 돌에 이를 새기고 커다란 비를 세워 후대에 전해지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특별히 윤지(綸旨)를 내려 신에게 문장을 짓도록 명령하시니 신이 재주가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여 사양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였고 임금님의 명령을 끝까지 받들지 않는 것도 신하의 정성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문장은 이미 조아(曺娥)의 비송(碑頌)에 미치지 못하고 문(文)과 질(質)을 맞추는 것은 육기(陸機)의 부언(賦言)에 어그러집니다. 얼굴이 두꺼운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면서 다만 그 일을 기록하되 있는 사실을 기록할 뿐입니다. 명(銘)으로 운을 맞추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의 성군으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계셨으니
도(道)와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仁)과 효(孝)로 백성을 교화하셨네.
순임금은 효성으로 다스리고, 요임금은 어짊으로 다스리니
윗사람은 실천하고 아랫사람은 순박하며, 풍속은 두텁고 풍속은 아름다웠다. (其一)
뒷사람이 계승함에 모두 그 다스림을 생각하니
비록 어질고 효성을 하였지만 끝까지 한 사람 드물었다.
처음에는 실천하여도 중도에 그만두니
책에서 아름답게 칭송함을 듣지 못하였다. (其二)
오직 우리 밝은 임금 옛 성현을 스승삼아 정사를 베푸시니
요임금을 따라서 풍속을 보살피고 순임금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시네.
그 덕을 닦음에 조상을 잊지 않았으니
지극한 효성에 사람들이 귀의하고, 지극한 덕에 하늘이 돌보시네. (其三)
무엇을 성인이라 하나. 덕으로 선정(善政)을 베풀고
윗사람을 편안히 하며 백성을 다스리고, 조상을 높이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
자비로 만물을 기르고 효성은 모든 행실에 으뜸이니
우리 임금의 하시는 일 여기에 다 갖춰져 있네. (其四)
왕위에 오르시고 늘 부모의 은혜 생각하니
추존(追尊)의 예절 갖추고 의호(懿號) 높이 올리셨네.
개장(改葬)을 함에는 현침(玄寢)을 견고히 갖추었다.
유전(儒典)을 이미 받들었으니 부처의 가르침 어찌 따르지 않으리. (其五)
영취산 아래에 형세가 으뜸이니
안개 빛은 계곡에 빛나고 산은 연이어 들판을 둘렀다.
터를 살펴 정사(精舍)를 세우니
산천의 주인을 얻고 경전은 중국에서 왔다. (其六)
빈번히 대장경을 펼치고 거듭하여 용이(龍頤)를 움직이시니
사부대중에 가르침을 전하고 설법은 온종일 이어진다.
복은 산 자와 죽은 자에 두루 미치고 이익은 신기(神祇)에도 미치니 
한 사람의 효성을 모든 백성이 따라 하도다. (其七)
부모님의 사랑은 갚아도 한이 없고
부처님의 서원은 실천함에 쉴 때가 없네.
착한 일을 행하면 부처님이 찬탄하시니
교화는 먼곳까지 미치고 행적은 유현(幽顯 : 저승과 이승)에 두루 빛나네. (其八)
생전에 보답함은 황천을 감동시키고
사후에 명복을 빌면 황천에 미친다.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키면 조상의 업적이 길이 이어지리라.
공덕은 두텁게 될 것이고 효성도 이보다 큰 것이 없다. (其九)
복을 심는 땅이니 여기가 곧 좋은 밭이라
추모의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일 없도다.
세월이 흘러 바다가 마르고 골짜기가 변하여 평평하게 되어도
우리 임금의 효성은 만대에 전해지리라. (其十)
송나라 천희(天禧) 5년 신유년(현종 12, 1021) 가을 7월 갑술 초하루의 21일째 갑오일에 세우다.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 신(臣) 정진(定眞), 비서성저후(秘書省抵侯) 신(臣) 혜인(慧仁) 신(臣) 능회(能會) 등이 왕명을 받들어 글자를 새기다.
유격장군(游擊將軍) 신(臣) 김저(金佇)가 왕명을 받들어 비석의 덮개[盖]를 새겨 만들다.
 (음기)
고려국 영취산 대자은현화사비 음기
추충진절위사보국공신 흥록대부 검교태위 수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겸태자소부 상주국 제양군개국후 식읍일천호(推忠盡節衛社輔國功臣 興祿大夫 檢校太尉 守內史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兼太子少傅 上柱國 濟陽郡開國侯 食邑一千戶)인 신(臣) 채충순(蔡忠順)이 왕명[宣]을 받들어 짓고 쓰다.
신이 성인의 지극한 가르침을 들으니, 유교의 경전에서는 뜻을 기르고 부지런히 닦으면 정교(政敎 : 정치와 교화)가 잘 된다고 하였고,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마음을 경건하게 하면 복록(福祿)을 얻게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 바 (유교와 불교가) 서로 삼교(三敎 : 유교·불교·도교)의 으뜸이라고 하지만 서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참된 이치를 안으로 깨달으면 교화의 공덕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어짊과 효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므로 선생(先生 : 공자(孔子)를 가리킴)께서는 ‘효는 덕의 근본으로서 가르침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선왕들은 효성으로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 가르침은 엄하지 않아도 잘 이루어졌고, 그 정치는 무섭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서 천하는 평화롭고 재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교에서도 또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이야기하였으니 자세한 것은 그 책의 내용과 같아서 다시 번거롭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와 불교의 두 가르침에서 모두 효성을 으뜸으로 하였으니 효성은 지극한 것이고 그 공덕은 두텁습니다.
또한 『금광명경(金光明經)』에서 ‘업(業)의 쌓임으로 인하여 사람들 중의 왕으로 태어나고, 국토를 거느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이라고 부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며 혹은 먼저 수호를 받고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간다. 비록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난 것이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 보건대 우리의 지금의 성상께서는 하늘의 신들이 수호하여 사람들의 왕으로 태어나셨으니 동쪽 나라[靑方 : 靑은 동쪽을 가리키므로 靑方은 동쪽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킨다]를 다스리면서 그윽한 덕을 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성상께서는) 만승(萬乘 : 천자를 의미함)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어짊을 베풀어 도덕이 빛나고 효성으로 다스려 교화가 이루어지니 백성들이 기꺼이 모시고 팔방(八方)의 사람들이 즐거이 섬기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밖으로는 유교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루고 옛날과 지금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이른 바 신령스러운 앎이 선왕과 부처님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금의 임금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처음 왕위에 오른 이래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건릉(乾陵)이 사주(泗州 :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에 있어 제사를 드리기에 조금 멀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어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비로소 지난 정사년(현종 8, 1017) 4월 중에 길일을 택하여 인타리산(因陀利山) 아래의 좋은 땅으로 옮기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제 능 동쪽 가까운 곳에 산과 물이 감싸고 도는 형세로서 산들이 앞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고, 삼나무와 소나무가 푸른 자태를 보이며 날카로운 바위 사이에 울창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으니, 넓이는 불전(佛殿)과 법당(法堂)을 세우기에 알맞고 높이는 계단을 놓기에 적당하다. 바람과 볕을 끌어당기고 구름과 안개를 밀어내니 오랫동안 숨어 있다가 이제야 드러난 곳으로서, 마치 신인이 오랜 세월 감추어 두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신성한 임금의 오늘의 요구에 응하여 드러낸 것이니 (이곳에) 들어와 사용하여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아름답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림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관리와 백성들의 복일 뿐 아니라 신성한 임금이 기뻐하시는 바였습니다. 곧바로 이 신비로운 곳에 이와 같은 큰 가람 하나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으니 부모님을 천도하여 명복을 빌고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임금님의 살피심에 부합하여 우리나라[日邦 : 日邦은 해뜨는 나라라는 뜻으로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에 북을 가져왔으니, 북조(거란)에서 거듭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여 무기를 감추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찰을 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고 불상의 모습도 갖추어지자 다시 절 안 서북쪽에 별도로 진전(眞殿 : 국왕과 왕비 등의 진영을 봉안하는 건물) 한 곳을 지어 임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헌경영문효의대왕(安宗憲景英文孝懿大王)과 돌아가신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순성대왕태후(孝肅仁惠順聖大王太后) 그리고 돌아가신 누님인 성목장공주 원정왕후(成穆長公主 元貞王后) 등의 진영을 봉안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서 살아계실 때에 못지 않기를 빌었으니 이는 부처님과 하느님의 은택을 기원하면서 또한 돌아가신 분들이 복을 내려주실 것을 바란 것이었습니다. 경신년(현종 11, 1020) 10월중에 이르러 임금님의 어머님의 고향인 황주(黃州)의 남쪽 지역에서 진신사리가 출현하여 빛을 내며 허공에 떠서 빛나는 감응이 있었고, 또한 임금님 아버님의 산릉 근처에 있는 보명사(普明寺) 안에서 다시 부처님의 어금니가 출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의장을 갖추고 직접 교외로 나가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어금니를) 궁궐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그 깊은 경건한 마음에 불가사의한 감응이 있게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 절에 7층석탑 하나를 만들어 부처님의 어금니 하나와 사리 50알을 봉안함으로서 귀의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이어서 또 신유년(현종 12, 1021) 4월 중에 상주(尙州) 관할하에 있는 중모현(中牟縣 :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과 모서면 지역)에서 다시 사리 오백여 알이 출현하여 허공에 떠서 빛을 내는 일이 있으므로 근신인 중추부사 상서우승(中樞副使 尙書右丞) 이가도(李可道 : ? ~1034)를 그곳에 보내어 맞아 오게 하고 성상께서 다시 예를 갖추어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습니다. 과연 흰색과 붉은색으로 각기 광명을 내었습니다. 이에 그중 50여 알을 나누어 이 절로 가져와 주존불의 가운데에 안치하고 소상을 만들어 공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밖의 나머지는 모두 가져다가 내전도량(內殿道場 : 궁궐 안에 둔 사찰)에 안치하고 임금님께서 공양하셨습니다.
또다시 영험과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처음 이 절을 만들 때에 강당의 터를 파낼 때에 그 안에서 문득 검은 수정 구슬 한 알을 줍고, 그 뒤에 다시 지난 경신년에 금당의 터를 닦을 때에 다시 자수정 구슬 하나를 주워 주존불의 백호 사이에 안치하였는데, 이 일들은 서로 부합하고 상응하는 것으로서 영험을 찬탄하여야 합니다. 또한 지난번에 사신에게 종이와 먹 값을 들려 중화(中華 : 송나라를 가리킴)에 보내어 사유를 아뢰고 대장경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송나라에서) 특별히 대장경 한 질을 보내면서 (종이와 먹) 값으로 가지고 간 물건들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고 다시 우리의 바람에 따라 채색물감 2천여 량(兩)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을 입어 이 절의 불전과 법당, 진전 등을 모두 법도대로 채색하고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금종과 법고를 만드는 일이 완성되자 (성상께서는) 난가(鑾駕 : 국왕이 타는 수레)를 타고 군신들과 함께 예를 갖추어 행차하시어 함께 종을 치시고 더불어 기쁨을 함께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직접 조곡(租穀) 2천여 석(碩)을 시납하셨고, 여러 신하와 양반들도 각기 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시납하여 별도의 금종보(金鍾寶)를 만들어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여러 궁원(宮院 : 왕족들이 거처하는 곳)들도 (성상의) 큰 효성을 본받아 각기 전지(田地)를 헌납하여 (사찰을 완성하는) 훌륭한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다시 발심하고 서원하시어 나라의 발전과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매년 봄 4월 8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륵보살회(彌勒菩薩會 : 미륵보살에게 기도하는 모임)을 개설하였고, 또한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 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워 다시 매년 가을 7월 15일부터 3일낮 3일밤 동안 미타(彌陀) 도량을 개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장인들에게 특별히 명령하시어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과 3종류의 『화엄경(華嚴經)』『금광명경(金光明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목판을 새겨 이 절에 비치하고 별도로 반야경보(般若經寶)를 만들어 널리 이들을 인쇄하여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성상께서는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檢校太傅守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인 최사위(崔士威 : 961~1041)가 지난 번 별감(別監)을 맡은 이래로 세심하게 마음을 다하여 이 큰 원을 이루고자 하여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계속하여 사찰에 머무르면서 힘써 지휘하고 직접 감독하여 꼼꼼하게 만들고 장식과 꾸밈도 두루 갖추어 조금도 빠뜨림이 없으니 성상의 뜻에 그대로 부응하며 현명한 생각을 의지할만 하다고 생각하여 시중(侍中)을 더하여 주시고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이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성조도감사(成造都監使 : 현화사 창건을 담당한 임시관청인 成造都監의 책임자)인 예빈경(禮賓卿) 황보유의(皇甫兪義 : ? ~1042)와 부사(副使)인 전전중소감(前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 장작소감(將作少監) 이영(李英), 예빈소경(禮賓少卿) 용운(龍運), 판관(判官)인 중추일직 형부낭중 겸어사잡단(中樞日直 刑部郞中 兼御史雜端) 안홍점(安鴻漸), 녹사(錄事) 4인인 신호위장사(神虎衛長史) 이휘좌(李徵佐), 내사주서(內史主書) 백사효(白思孝), 소부승(少府丞) 최연가(崔延哿), 상서도사(尙書都事) 이성자(李成子), 그리고 도관사(道官使 : 현화사 창건에 참여한 승려관원인 道官들의 책임자)인 좌가도승록(左街都僧錄) 대사(大師) 광숙(光肅)과 부사(副使)인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언굉(彦宏),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석진(釋眞), 판관(判官)인 우가승정(右街僧正) 성보(成甫) 및 승기사(僧記事) 2인과 속기사(俗記事) 5인, 지리업(地理業 : 풍수지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의 삼중대통(三重大通) 정웅(鄭雄), 중대통(重大通) 김득의(金得義) 등에게도 각기 은택을 차등있게 베풀어 마음을 같이 하여 공덕을 함께 이룸을 기억하고 믿음과 정성을 다함을 표창하셨습니다.
(성상의) 지극한 서원이 거의 이루어졌으니 그 훌륭한 생각을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인 주저(周佇)에게 명하여 먼저 비문을 짓게 하고, 이어서 행이부상서 참지정사(行吏部尙書 參知政事)인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를 쓰게 하신 후 곧바로 훌륭한 장인을 시켜 글씨를 새겨 끝마치자 비석을 세울 때에 직접 왕림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행차하여 직접 보시고 ‘나의 뜻에 거의 부합되어 나의 마음이 매우 즐겁다’고 하시고 친히 비석 위에 오르시어 직접 붓을 휘두르셨으니, 비석의 전액(篆額)은 물론 ‘왕이 전액을 쓰다[御書篆額]’는 네 글자 역시 성상께서 직접 쓰신 것으로 성상께서 붓을 휘두르심에 용들[비석의 이수(螭首) 부분에 새겨진 용을 가리킴]이 구름과 물 속에 움츠리는 것 같고, 성상의 마음 쓰심에 거북이[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석의 귀부(龜趺)를 가리킴]도 반드시 그 영광에 감동하였을 것입니다. 이에 행차를 따른 많은 관료들이 모두 절하여 (성상의 글씨를) 보고서 다함께 만세를 외치며 우러러 찬탄하였습니다. 진전에 성상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존영을 안치할 때에는 성상께서 직접 시책(諡冊 : 시호를 올리는 책문)을 지어 예를 행함으로써 직접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어 반드시 명계에까지 통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울러 성상께서 직접 진전에 대한 찬문을 지어 전각 안의 동쪽과 서쪽 벽에 쓰게 하시고, 진전을 노래한 시는 나무판에 써서 진전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셨으며, 별도로 성상께서 지으신 시를 나무판에 써서 법당 문 바깥에 걸어두게 하여 다 함께 길이 전하여 두루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효성이 황천에 감응하고 도덕이 성스러운 시대에 비치는 것이니 실로 훌륭하신 군주의 문장으로 금으로 된 바닥에 금을 굴리는 소리이고, 훌륭하신 성인의 말씀으로 옥으로 된 거리에 옥을 굴리는 소리일 뿐 아니라 세속을 떠난 신인이 높은 산에 오른 감흥을 이야기하고 덕 높은 승려가 깨달음의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서 예전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고 오늘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각기 진영에 대한 찬문을 바치도록 하셔서 모두 진전 안쪽의 벽에 쓰게 하였습니다. 아울러 (진전을 노래한)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진전 바깥의 회랑에 걸어두게 하였는데, 재상과 추밀, 한원(翰苑 : 翰林院)과 윤위(綸闈 : 왕명을 짓는 誥院), 봉각(鳳閣 : 中書省)의 뛰어난 인재와 현인, 학자 등 모두 21인의 것이었고, 또한 이 절의 완성을 축하하는 시들을 모두 나무판에 써서 법당 바깥에 걸어 두게 하였는데, 44인의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구절을 처마 밑에 배열하고 좋은 문장을 창문 사이에 늘어 놓은 것이니 아름다운 비단이 함께 빛나고 아름다운 구슬이 비추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말과 풍속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일을 찬미하고 생각을 서술한 것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시경』에서 ‘찬탄함에 부족함이 있어 노래하고, 노래에 부족함이 있어 손과 발로 춤춘다’고 이야기한 뜻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향풍체(鄕風體)로 노래를 지으시고 이어서 신하들에게도 축하하는 시뇌가(詩腦歌)를 바치도록 하니 모두 11인이었고, 이들을 모두 나무판에 서서 법당의 바깥에 걸게 하였습니다. 이는 구경오는 사람들이 모두 각기 자신이 익힌 바에 따라서 아름다운 뜻을 알게 하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다만 걸려있는 시들을 보고서 노래한 뜻을 알게 하여 아름다운 소리가 두루 퍼져서 훌륭한 다스림이 완성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대장경에 대한 기문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 平章事) 강감찬(姜邯贊 : 948~1031)에게 짓도록 명령하셨고, 금당의 기문은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郎 平章事) 최항(崔沆 : ? ~1024), 종명(鐘銘)은 중추사(中樞使) 이공(李龔), 진전의 기문은 한림학사(翰林學士) 곽원(郭元), 숭경전(崇慶殿)의 기문은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 김맹(金猛), 현화사를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주저(周佇), 진전을 경찬하는 시들에 대한 전체 서문은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충(崔冲), 봉래전(蓬萊殿)의 기문은 치사한림학사승지(致仕翰林學士承旨) 손몽주(孫夢周)에게 각기 짓게 하시니 각자 훌륭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다함께 깊은 진리를 담아서 저 부처님의 교화의 방법을 서술하고 우리 임금님의 도덕의 가르침을 찬탄하였습니다. 모두 벽에 걸어 두어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바인데, 그 자세한 것은 이미 색깔있는 비단에 기록하였고, 그 나머지는 찾아서 이제 듬성듬성한 삼베에 적었습니다. 이에 신 채충순(蔡忠順)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비의 뒷면에 (음기로) 적게 하시니 붓놀림의 둔함은 홍두깨를 잡은 것 같고 학식의 모자람은 벽을 뚫고 있는 것 같은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외람되이 밝은 명령을 찬(撰)받았으니 오직 정성을 다하여 좋은 문장의 나머지를 주워서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고자 바랄 뿐입니다. 군자들이 두루 살펴본다면 감히 저의 하는 바가 어찌 (성상의) 영명하심을 더럽히는 황송스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태평(太平 : 거란 성종(成宗)의 연호, 1021~1030년 사용) 2년 임술년(현종 13, 1022) 가을 10월[相月] 어느 날에 삼가 적다.
대덕 사자사문(大德 賜紫沙門)인 신(臣) 석정(釋定)과 진속비서성지후(眞屬秘書省祇侯)인 신(臣) 혜인(慧仁), 지후(祇侯)인 신(臣) 능회(能會) 등이 왕명[宣]을 받들어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