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페이지 외쪽 그림
 
 

홈 > 금석문연구 > 금석문이해하기  
   
   
 
 
 
[그림 1] 함안 성산산성 출토 이면묵서목간
 
신라 말인 886년(헌강 12) 북진(北鎭)에서 ‘북쪽 오랑캐들이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놓고 돌아갔다’고 보고하고 그것을 바쳤는데, 거기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신라와 화통하고 싶다(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는 15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처럼 표면에 문자를 기록하여 의사를 전달하는데 쓰인 나무 조각을 목간이라 부른다. 목간은 고대의 기록 매체이자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파피루스, 양피지와 마찬가지로 종이가 발명되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목간은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었다. 중국은 죽간(竹簡)이라 하여 대나무를 쓰기도 했으며, 이집트, 로마, 유럽 대륙에서도 목간은 많이 발견된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가장 오랜 목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책(冊)’은 목간에 기록을 마친 다음 위, 아래에 구멍을 뚫고 여러 개의 목간을 끈으로 연결한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이를 보관할 때는 두루마리 처럼 둘둘 말고, 봉니(封泥)라고 하여 끝 부분에 찰흙 덩어리를 붙인 다음 도장을 찍어서 봉인했다. 이것을 ‘권(卷)’이라 한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은 공자가 말년에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다보니 세 번이나 책 끈이 떨어졌다는 고사인데 그 책은 가죽 끈을 이용해서 목간을 연결한 형태였을 것이다.
 

 
기록은 묵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음각하거나 다시 그 홈에 묵서를 덧씌운 예도 있다. 잣대 모양은 앞, 뒷면에 문자를 기록하기도 하고, 막대 모양은 네 면을 모두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목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글자를 잘못 써서 고칠 경우에 그 자리를 작은 손칼로 깍아내고 다시 쓸 수도 있고, 그 기록의 용도가 다하면 표면 전체를 깎아내고 다른 내용을 기록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손칼이 지우개 역할을 한 셈이다. 고대에 기록이나 문서 작성을 담당한 관리를 ‘도필지리(刀筆之吏)’라고 하였는데, 양손에 붓과 손칼을 쥐고 목간을 작성하던 모습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리고 여러 번 표면을 깎아서 재활용을 하게 되면 두께가 얇아져서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또 기밀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 전에라도 소각하거나 목간 가운데를 부러뜨려 폐기하게 된다.
 

 
우리 나라와 일본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간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고 형태도 다양하다. 내용에 따라서 분류하면 일반 기록용, 문서로 쓰인 것, 물품을 운송할 때 내역을 기록하여 딸려 보낸 것, 제사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 것, 낙서 등 기타 용도의 목간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각각의 용도와 내용, 보관 및 운송 방법에 따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본 헌강왕대에 발해 혹은 그 휘하에 있던 말갈 부족들이 신라에 건넨 목간은 길쭉한 사각형 나무 조각에 글씨를 쓰고 한쪽 끝에 낸 구멍에 실을 꿰어 나무에 걸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물품 운송에 쓰인 경우는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짐을 묶은 끈 사이에 끼워 넣거나, 한쪽 끝에 낸 구멍에 실을 꿰어 짐에 묶기도 했다.
 
[그림 2] 안압지 출토 이면묵서목간
 

 
목간은 종이처럼 가볍거나 작은 부피에 많은 양의 정보를 기록할 수는 없지만, 내구성이 우수하고 물에 젖어도 쉽게 훼손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종이가 보급된 뒤에도 표찰, 호패(戶牌)와 같은 패찰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목간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유적 발굴을 통해 출토된 것들이다. 중국의 경우 20세기 초에 처음 발견된 이래, 서쪽 감숙성 지방에서는 주로 이민족과 대치상황에서 벌어진 군사적 내용을 적은 목간이,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무덤에서 목간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은 1920년대 최초의 발견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20만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으며, 8세기 나라시대의 왕궁이었던 평성궁(平成宮)같은 궁궐터에서 많은 양이 나왔다.
 

 
[그림 3] 함안성산산성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반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에서 50여 점의 통일신라 목간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 후 경주의 월성 해자, 황남동, 하남의 이성산성, 부여의 궁남지, 쌍북리, 능산리 절터, 함안의 성산산성, 김해 봉황대 등에서 속속 목간이 발견되었다. 백제와 신라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200여 점을 헤아리는 목간이 발견되었고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고구려는 목간이라고 확정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형태와 용도를 잘 알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특히 봉황대에서 출토된 목간처럼 학습 혹은 교육용으로 『논어』의 문장을 기록한 예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목간의 출토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문헌자료가 적은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리라 기대한다. 목간은 후대인들이 기록한 2차 사료가 아닌 동시대 자료로서, 고대인의 문서 행정과 수취, 생활상 등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해주는 일급 사료이다. 더욱이 국외자나 후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작성했기 때문에 작성자의 의도가 굴절 없이 드러난다는 특징이 있다. 목간은 다른 고고학 유물처럼 출토 상황과 형태를 통해 과거를 알려줄 뿐 아니라 문자 기록으로써 과거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고대 세계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타임캡슐과도 같다.
 

 
※주제어
죽간(竹簡), 책(冊), 봉니(封泥), 도필지리(刀筆之吏), 표찰, 호패(戶牌), 패찰, 안압지(雁鴨池), 통일신라 목간, 월성 해자, 황남동, 하남의 이성산성, 부여의 궁남지, 쌍북리, 능산리 절터, 함안의 성산산성, 김해 봉황대, 고대인의 문서 행정과 수취 생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