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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調露二年』銘寶相華文塼
 
와전토기명은 기와, 벽돌, 그리고 토기에 명문을 새긴 것을 말한다. 여러 금석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나, 명문 내용이 단순하여 사료적 가치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대개 기와와 벽돌, 토기를 만들어 가마에서 굽기 전에 새기개를 이용하여 글자를 직접 새기거나 인각(印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간혹 구운 후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또 붓으로 글자를 쓰기도 한다.
 

직접 글자를 새기거나 쓴 경우 우서(右書)가 많고, 인각(印刻)한 경우 대부분 좌서(左書)에 해당한다. 기와에 새긴 글자의 내용을 분류하면, 길상어(吉祥語), 기와의 제작처와 제작자, 제작시기, 사용처, 불경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기와에는 시주자(施主者)의 이름을 새긴 것도 많이 보인다. 길상어를 새긴 기와는 낙랑시대부터 발견되며, 보통 천추만세(千秋萬歲), 부귀(富貴) 등의 글자를 새겼다. 고대의 기와 가운데 제작처를 밝힌 경우가 다수이고, 또 사용처를 알려주는 명문도 여럿 발견된다. 특히 경주지역에서 사원명(寺院銘) 기와가 다수 발견되는데, 이를 통하여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전하는 신라나 고려시대 사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사원명의 기와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나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다.
 

기와 명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큰 것은 지명(地名)이나 부명(部名)이 포함된 것들이다. 충남 부여와 전북 익산지역에서 5부의 명칭을 새긴 인각와(印刻瓦)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때 5부 명칭의 의미에 대하여 기와집이 있는 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기와의 제작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와공(瓦工)의 소속 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부명의 인각와가 발견되는 지역이 부여와 익산지역으로 한정되고 있는데, 이점은 사비시대 백제의 기와 공급 체계와 아울러 부도(副都)인 익산의 역사적 성격을 밝힘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신라 6부의 명칭을 새긴 기와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습비부와 한기(한지)부명을 새긴 기와들은 주로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며, 그 의미는 제작처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한편 청주의 상당산성, 안성의 비봉산성, 그리고 광주의 무진고성에서도 부명와(部銘瓦)가 발견되었다. 상당산성에서 발견된 와명의 전문은 ‘沙喙部屬長池馹(升達)’이다. 이것은 ‘사훼부에 속하는 장지역에서 (올린 것이다)’ 또는 ‘사훼부에 속하는 장지역의 (승달이 만든 것이다)’로 해석된다. 청주는 신라시대 서원경이다.
 
[그림 2] 광개토왕호우명문
 

따라서 상당산성 기와의 명문은 소경도 신라의 수도 왕경처럼 6부로 구획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한편 광주의 무진고성에서 발견된 기와 명문에서도 훼(喙), 사훼(沙喙)라는 글자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소경뿐만 아니라 주치(州治)도 6부로 구획하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안성 비봉산성 출토 본피(本彼)명 기와는 국원경(충북 충주)의 본피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지방에서 발견된 부명기와들은 통일신라시대 지방통치조직의 연구에서 가장 일차적인 사료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명을 새긴 기와 가운데 경기도 하남시 선동에서 발견된 것들이 가장 주목을 끈다. 명문의 내용을 조사한 결과 지명+수국(受國) 또는 수(受)+해구선(蟹口船) 또는 해구단(蟹口單)이다. 경기도 포천의 반월산성,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점촌마을, 아차산성에서 동일한 형식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명문은 해구에 위치한 국영 와요(瓦窯)에서 통일신라시대 한산주의 각 군현에 기와를 공급하였다는 내용으로 정리되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기와 공급체계와 아울러 중간 행정기구로서 한산주의 역할을 규명할 때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될 것이다. 이밖에 지명+관(官)자를 새긴 명문기와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것 역시 각 지방에 산재한 국영 와요(瓦窯)에서 공급하였던 사실과 관련이 깊다. 또한 연호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은 기와 제작의 발전과정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림 3] 청동유명호우
 
글자를 새긴 벽돌의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낙랑과 대방의 벽돌무덤(塼築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명문의 내용은 주로 벽돌의 제작시기와 제작자, 그리고 무덤의 주인공, 길상어구에 관계된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소봉리 1호분에서 발견된 장무이전(張撫夷塼)이 가장 많은 글자를 새긴 것에 해당하는데, 그 내용은 벽돌무덤을 축조한 시기와 그 책임자, 무덤 주인공의 관직, 애도문(哀悼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밖에 관직명을 새긴 벽돌, 낙랑과 대방군 폐지 이후에 만든 것들은 현재 고구려의 낙랑ㆍ대방 고지 지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백제에서는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중방(中方)’, ‘대방(大方)’ 등의 글자를 새긴 벽돌이 충남 공주시 송산리 6호분에서 발견되었다. 양관명와는 백제가 양나라의 기술을 모범으로 기와를 제작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어 주의를 끈다.
한편 신라의 명문전으로 안압지에서 발견된 ‘조로이년(調露二年)’명전이 가장 유명하다. 내용은 조로 2년(680)에 한지벌부(漢只伐部)의 군약(君若) 소사(小舍)가 3월 3일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6부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외에 경주 석장사지나 안압지에서 바닥에 깐 벽돌 가운데 그 위치를 표시한 것이 다수 발견되었다. 기와와 벽돌에 비하여 토기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는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그리고 그릇을 빚어 가마에서 구운 후에 새기개로 글자를 새긴 경우나 붓으로 글자를 쓴 경우가 많은 편이다. 평양의 정릉사지에서 ‘정릉(定陵)’ 등의 글자를 새긴 고구려 토기편을 다수 발견하였고, 백제와 가야지역에서도 ‘북사(北舍)’와 같은 관청, 관직, 인명을 새긴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명문 토기 가운데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의 안압지에서 발견된 것들이 비교적 사료적 가치가 큰 편이다.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대중12년명 토기는 미륵사, 정좌(丁坐), 사(史)라는 관직명을 함께 전하고 있어 주목을 받는다. 한편 안압지에서 발견된 다량의 토기편에서 다양한 명문이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세택(洗宅)’과 같은 관직이름, 신앙과 관계된 ‘신심용왕(辛審龍王)’ 등의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두오도(四斗五刀)’ 또는 ‘십석입옹(十石入瓮)’ 등의 명문은 신라시대 도량형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자기류에 글자를 새기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주제어
우서(右書), 좌서(左書), 기와에 새긴 글자의 내용, 5부의 명칭을 새긴 인각와(印刻瓦), 부명와(部銘瓦), 통일신라시대 지방통치조직의 연구, 지명+수국(受國), 수(受)+해구선(蟹口船), 해구단(蟹口單), 국영, 와요(瓦窯), 지명+관(官)자를 새긴 명문기와, 벽돌무덤(塼築墳), 장무이전(張撫夷塼), 양관명와, ‘조로이년(調露二年)’명전, 대중12년명 토기, 신라시대 도량형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