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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가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고려 명종 4) 금(金)의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갔다는 기사가 있어 1174년 이전에 이미 제대로 된 사원이 갖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는 인도 출신 승려 지공(指空)이 천력(天曆, 1328 ~ 1329) 연간에 고려에 머물면서 이 지역이 천축(天竺)의 나란타사(那蘭陀寺) 와 매우 흡사하고, 가섭불(迦葉佛) 때의 큰 도량과 같다고 선각왕사(禪覺王師)인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 ~ 1376) 에게 말하여 크게 중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선각왕사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옹은 스승이었던 지공이 중건한 회암사가 전란으로 인하여 불타자 대대적인 중창불사(重創佛事)를 일으켰다. 그리고 1376년 4월 회암사의 전당(殿堂)을 확장하는 공사가 끝나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크게 개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유신(儒臣)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원찰(願刹)로 그 자리를 지켰다. 태조(太祖)는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고 7차례나 다녀갔으며,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는 은신처로 삼고 많은 전답(田畓)을 내리기도 하였다. 중종비(中宗妃)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불교의 중흥이 도모되었을 무렵인 1565년(명종 20) 회암사는 ‘태종대왕 능침사(太宗大王 陵寢寺)'로서 보우(普愚, 1509 ~ 1565)와 함께 큰 불사(佛事)를 계획하여 1565년 대설무차대회(大設無遮大會)를 열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무차대회 전날 갑자기 서거하자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고 회암사는 원인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고, 다시는 중창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 경기도 박물관과 기전매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사역(寺域)의 규모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회암사는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다수의 건물이 건립되면서 대찰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회암사는 고려말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지공선사(指空禪師), 선각왕사(禪覺王師), 무학대사(無學大師) 등이 머물면서 왕이나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들 3명의 고승들은 소위 삼화상(三和尙)으로 불리며, 조계종의 종풍(宗風)과 아울러 중흥조(中興祖)에 따른 법통(法統)을 이었으며, 불교계 중심적인 사찰로서의 회암사의 위상을 높였다.

 

1821년 봄에 이응준(李膺峻)이라는 선비가 회암사 삼화상[三和尙 :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의 비와 부도를 제거하고 선친의 유해(遺骸)를 안장하면 대길(大吉)하다는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의 말을 듣고 회암사지 북쪽 언덕에 있던 지공의 부도를 헐고 그 자리에 선친을 투장(偸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말썽의 소지를 없애고자 옆에 있던 지공대사비를 깨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언덕 위쪽에 있던 나옹의 부도는 물론 아래쪽에 있던 무학의 비마저 부수고 부도 안에 있던 금은으로 된 사리 그릇을 훔쳤다. 무학의 부도는 이보다 앞서서 다른 도둑이 이미 깨버린 상태였다. 즉 회암사지에 차례로 건립된 고려 말 조선 초의 삼화상의 부도와 비 가운데 다른 언덕에 세워져 있던 나옹의 선각왕사비를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석물이 1821년에 모두 파괴된 것이다.

경기도감사를 통하여 투장 사건을 보고받은 조정은 원상회복과 함께 범인을 멀리 섬으로 유배 보내도록 조처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이 조정에 보고될 정도로 파문이 컸던 까닭은, 이 때 훼손된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비가 다름 아닌 태종(太宗)의 명으로 건립된 것이기 때문이 다. 당시 순조 임금은 고승의 탑비가 훼손되어서가 아니라 왕실의 위엄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 후 1828년(순조 28) 다시 비와 부도가 세워지고 회암사지에서 700m쯤 떨어진 북쪽 골짜기 비탈에 현재의 회암사가 창건되었다.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 1327 ~ 1405)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로 1353년 원(元)에 유학하여 나옹(懶翁) 혜근(慧勤, 1320 ~ 1376)과 지공(指空, ? ~ 1363)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 이후 특히 나옹 이후에는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 ~ 1392)가 교단을 영도한데 비하여 무학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 직후 태조(太祖)에 의해 비로소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태조는 무학을 각별하게 존중하여 무학이 살아 있을 때인 1397년에 이미 그 부도는 회암사에 세워졌다. 그 후 무학은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년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고려 말의 승려 가운데 지공과 나옹은 높이 평가하였지만 무학에 대하여는 평가가 인색하였다. 그런데 1410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이 태조의 뜻이라며 태종에게 말하자, 태종이 부도 곁에 무학의 비석을 세우도록 명한 것이다. 

지금의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이 조성된 석단(石壇)의 아래쪽 정면에는 재건된 무학대사의 부도비가 있는데, 그 오른쪽에는 원비에 쓰여졌던 사각받침이 있고, 그 위에 하엽형(荷葉形) 지붕이 올려져 있다. 이곳은 북쪽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받이의 가파른 비탈로 지공선사(指空禪師)와 무학대사의 원비파편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원비문은 무학의 제자가 바친 행장(行狀)을 토대로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며, 공부(孔俯)가 해서체로 썼고, 추기비음(追記碑陰)은 김이교(金履喬)와 김겸(金鎌)이 지었다. 원비의 사각받침을 살펴보면 3단 높이로 되어 있고, 비신을 꽂았던 비공(碑孔)은 중건비와 차이가 있는데, 원비의 비신이 중건비보다 폭은 더 넓고 두께는 얇았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하엽(荷葉)이 덮인 형태로 조선시대 비의 형식에 있어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다행히 1821년 투장 사건 당시 훼손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아서, 1828년(순조 28) 5월에 비석을 중건할 때 원비의 글씨를 그대로 모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 중건에 관한 전말은 함께 재건된 지공선사비 음기에 적혀 있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8-1번지, 회암사지 북쪽 기슭에 중건된 현재의 비는 방형대좌에 옥개석을 갖춘 전형적인 조선시대 비(碑)로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256cm, 너비 91cm, 두께 29cm이다. 낮은 지대석 위에 모죽임을 한 사각받침을 놓고, 흑청석제(黑靑石製)의 비신을 세웠으며, 날렵한 팔작지붕이 그 위에 놓여 있다. 비신에 비해 받침이 크고, 지붕은 낮고 작은 편이다. 이 비석 옆에 파손된 원비의 비좌가 남아 있으며, 비편 일부는 지공선사비편과 함께 수습되어 현재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무학의 비는 조선왕조 개창 직후 무학이 주도한 스승 지공과 나옹에 대한 현창 운동의 내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무학은 이러한 현창 운동을 통하여 자신이 나옹의 적통임을 국가와 교단으로부터 두루 인정받고자 하였으며, 어쨌든 이를 계기로 지공, 나옹, 무학을 묶어서 삼화상으로 부르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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