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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1948년 부여읍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본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부여에 신궁(神宮)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도로에 깔려고 부여 읍내에서 초석이나 지대석 등을 모아두었는데, 그 석재 속에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이다. 당시 온전하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의 것만 전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백제시대의 유일한 석비이다.

양질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쭉한 사각형을 하고 있다. 곧, 네모의 석주형이다. 그 앞면을 다듬어 가로 세로로 줄을 그어 1변이 7cm인 정방형의 정간(井間)을 구획하고, 그 칸 안에 한 자씩 글씨를 음각하였다. 1행은 1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 모두 56자가 남아 있다.

비의 우측면 상부에는 직경 20cm의 원 안에 봉황문을 음각하였으며, 붉은 칠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원 안에 봉황문을 음각한 것은 음양설에 따른 듯하다. 

백제에 사씨(沙氏) 성이 있었던 점, 백제에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란 인물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의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의 갑인년(甲寅年)과 사택지적이라는 인물에 근거할 때 654년(의자왕 14)이라고 추정된다.

 

비문의 자체(字體)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 매우 세련되어 있다. 글씨가 비교적 크며 서체가 방정하고 힘이 있어서 남조보다는 북조풍이 짙다고도 한다.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를 따랐다.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갑인년정월구일내기성사댁지적)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강신일지역왕개체월지난환천금)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이건진당착옥이립보탑외외자용)
          吐神光以送雲含聖明以 (토신광이송운아아비간함성명이)

『역주 한국고대금석문』(1992)에 번역문이 있다.

“갑인년(甲寅年) 정월 9일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니, 그 높디높은[巍巍] 자애로운 모습은 신령스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이 비문에서 사육변려체를 연상시키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강신일지역왕, 개체월지난환)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천금이건진당, 착옥이립보탑)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외외자용, 토신광이송운)
          , 含聖明以▨▨ (아아비간, 함성명이▨▨)

전체 문장은 6-6, 6-6, 4-6, 4-6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럽다'라는 뜻을 지닌 ‘강신일지역왕(慷身日之易往), 개체월지난환(慨體月之難還)'의 두 구를 보면 대장(對仗)의 형식을 잘 지키고 있다. 슬퍼하다는 뜻의 강(慷)과 개(愾)가 짝을 이루고, 신일(身日)과 체월(體月), 이왕(易往)과 난환(難還)이 짝을 이루고 있다.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옥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우다'라는 뜻을 지닌 ‘천금이건진당(穿金以建珍堂), 착옥이립보탑(鑿玉以立寶塔)'의 두 구도 대장 형식을 잘 지키고 있다. 천금(穿金)과 착옥(鑿玉)이 짝을 이루고, ‘건(建)-진당(珍堂)'과 ‘입(立)-보탑(寶塔)'이 짝을 이룬다.  

그 다음은 외외자용(巍巍慈容)과 아아비간()이 짝을 이루고, 토신광이송운(吐神光以送雲)과 함성명이▨▨(含聖明以▨▨)이 짝을 이룬다. 

그런데 운자(韻字)가 놓여져야 할 위치에 있는 글자들을 보면 압운을 하지 않았다. 평수운(平水韻)에 의하면 환(還)은 평성 선(先)운, 탑(塔)은 입성 합(合)운, 운(雲)은 평성 문(文)운이다. 여러 상고음 분부설(分部說)을 고려한다고 하여도, 그 세 음은 압운하였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구법(句法)면에서는 사륙변려체를 따랐지만, 완전한 사륙변려체라고는 할 수 없다.

 

사택지적은 백제의 8대 귀족가문의 하나인 사택씨(砂宅氏) 곧 사씨(沙氏) 출신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 원년(642) 조에 의하면 그는 대좌평(大佐平)으로서 왜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대좌평이라는 최고위 관등을 지니고 활동하였으나, 의자왕 14년(654)에 정계에서 밀려났다.

사택지적은 스스로를 내기성(奈祇城) 사람이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사택지적이 정계에서 물러나 부여가 아닌 내기성으로 은퇴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비석이 내기성 지역이 아니라 부여 읍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내기성은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기성에 대해서는 부여 은산(恩山)을 가리킨다는 설과, 부여 가까이의 매라(邁羅) 지역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사법명(沙法名)에게 ‘행정로장군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이라는 작호가 주어진 것이 있고, 또 부여 가까이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 목간에 매라의 지명이 들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사택씨 즉 사씨들은 부여인 사(泗)에서 활동하였다. 사택지적도 정계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부여 안의 저택에 거쳐하면서 소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택지적은 “금을 캐어 진귀한 집[珍堂]을 짓고 옷을 파내어 보배로운 탑[寶塔]을 세웠다.” 곧, 실의의 마음을 불교에 귀의하여 해소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백제에서는 동명신(東明神:주몽) ·국모신(國母神:유화 부인) ·구태신(仇台神:고이왕) 및 민간신앙이 있었지만, 불교도 전래되어 있었다. 곧, 384년(침류왕 1) 동진(東晉)에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하고, 385년 광주(廣州)에 한산사(漢山寺)를 세워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종파는 율종(律宗)과 성실종(成實宗)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 남조(南朝)와 국교가 열리면서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활약하였고, 성왕(聖王:523∼554) 때를 전후해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법왕(法王:599~600) 때는 살생금지령과 사상통일에 노력했으며, 무왕 때는 왕흥사(王興寺) · 미륵사(彌勒寺)를 건축하여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사택지적비에는 노장사상(老莊思想)도 들어 있다.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사리 돌아오는 것이 서럽다.”라고 한 것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제에 도교(道敎)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부여에서 출토된 산경전(山景塼:화전)에 삼신산(三神山)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교도 유행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 근구수왕조(近仇首王條)에도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면…'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사택지적도 불교사상만 아니라 노장사상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사택지적비의 비문은 사택지적의 자기고백과 같은 문체로, 1인칭으로 되어 있다. 건축물의 조성에서 그 연기(緣起)를 밝히면서 자기고백의 문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사택지적비는 건축물 영건(營建)의 시기를 첫머리에서 밝히면서 ‘갑인년(甲寅年)'이라는 간지를 사용하였다. 당시 백제에서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서, 연도를 표기할 때 간지를 밝히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신라의 ‘임신서기석'에서 ‘임신년(壬申年)'이라는 간지를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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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사상, 성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