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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안교(萬安橋)는 효성이 지극했던 조선 제22대 정조(正祖: 1776~1800 재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현륭원, 융릉〕을 참배 하러 갈 때, 참배행렬이 편히 건너도록 축조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형 돌다리〔홍예석교(虹霓石橋)〕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楊洲)에서 화산(華山)으로 이장한 후,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으며, 당초의 참배행렬은 궁궐을 떠나 노량진(駑梁津)-과천(果川)-수원(水原)을 거치는 것이 빠른 길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의 형(兄) 약로(若魯)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시흥쪽으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정조가 만안교를 지난 것은 7번째 능행부터이며, ‘만안교'라는 다리이름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원래 위치는 현 위치로부터 남쪽 200m지점에 있었으나 국도(國道)확장으로 1980년 8월에 현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다리는 처음에는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경기관찰사 서용보(徐龍輔)는 돌다리로 이를 대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당시 경기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사 끝에 길이 31.2m, 너비 8m의 무지개형 돌다리를 조성하였다. 무지개형수구는 하단부터 곡선을 그어 전체 모양으로는 반원을 형성하여 매우 아름다운 모습으로 물이 흐를 때 다리가 손상될 것을 염려하여 다리부분을 뾰족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였다. 만안교의 특징은 시내의 바닥에 판석을 깔아 홍수가 발생해도 바닥이 패여 다리가 유실되지 않게 하였고, 다섯 개의 갑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축조하였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무지개형 돌다리로 축조양식이 정교하다.
 

만안교 옆에  만안교의 조성에 관한 연혁을 기록한 만안교비가 있다. 만안교비의 음기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씨를 썼다. 전면에는 <萬安橋>라고 유한지(兪漢之)가 쓴 예서대자가 주칠되어 있다. 이 비는 귀부와 비신, 가첨석을 갖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유한지는 김정희에 앞서 전서와 예서를 잘 쓴 인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예서는 청으로부터 수입된 한비의 영향을 받아 한예(漢隸)의 전형을 본받은 글씨를 구사하였다. 만안교비 음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남충현의 주치 남쪽 20리에 안양천이 있는데 바로 화성으로 가는 연로이다. 우리 성상께서 해마다 원침을 전알하려면 이 하천을 건너게 된다. 올 봄에도 자가를 모시고 이 내를 건넜으니 이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무릇 행행지에는 하천이 있기 마련이고 하천마다 다리가 있기 마련인데 이들 다리는 나무로 놓아다가 왕의 행행이 지난 뒤에는 바로 철거하였다. 이로써 얼음 풀릴 때나 장마가 질 때에는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다. 전 도신 서용보가 이 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돌로써 대체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미천한 신이 명을 받고 취임하여 맹추에 이 일을 착수하여 3개월 만에 준공하니 길이는 15장이요, 폭은 4장이며, 높이는 3장이고, 갑문이 다섯 개이다. 임금께서도 이 일을 아시고는 감독하는 사람과 공장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리고 특별히 ‘만안교'란 이름도 내리셨다. 신이 생각건대 왕자가 다리로 편안히 건너게 된 것은 한나라의 장안교에서 비롯하였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도강과 여량은 성주 때에 이루어졌으나 돌로 만들어 만세에 전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 다리는 다행히도 화성 연로에 있으니 성가는 1년에 한 번, 자가는 1달에 한 번씩 육룡에 멍에를 메이고 팔란을 울리면서 편안히 지나갔다가 편안히 오기를 만년을 한결같이 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편의는 만백성에게까지 미쳐 원근의 짐 꾸러미들이 튼튼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이제는 옷을 걷어 올리거나 험한 길로 돌아서 갈 걱정이 없어졌다. 이로써 만년토록 성은을 입게 되고 자덕을 기리게 되었으니 어찌 참으로 성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사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 하천가에서 돌을 채벌하는데 과연 돌이 나와 경비를 반감할 수 있어 마치 신이 도운 것 같았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신은 배수계수하고 그 일을 기록한다.

송은 다음과 같다.

“왕께서는 해마다 한 번씩 원침에 행행하시오니 이 다리 건너시길 만 번을 하시옵소서. 복록과 함께 이르게 되리니 아래에는 내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가를 모시고 만년동안 만안하소서, 은혜가 백성에 미치니 마음 놓고 건넘에 환성 올리도다. 천년만년 편안하기 반석과 같도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도순찰사 규장각검교직제학 신 서유방 삼가 지음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 조윤형 삼가 씀
학신 유한지 전면 삼가 씀

감동 첨사 김천보
오위장 장정
오위장 김대연
오위장 김원섭
영패 가선 서협수
영교 가선 서의린
영리 이효석
각수변 이삼흥
석수변수 최귀득 박복돌
홍예변 최흥서
야장변수 정일성

상지 19년(정조 19, 1795년) 9월 일 세움

만안교에서는 매년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만안교 다리밟기(답교놀이)가 펼쳐진다. 만안교 다리밟기를 하면 그해 풍년이 들고 농사일을 하면서 다리와 허리가 아프지 않다고 전해진다. 호계동 지역과 만안교 지역에서 정월 초닷새(1월 5일)부터 열엿새(16일)까지 주로 마을 떡국을 대접받아 오던 축제였다. 만안교 다리밟기는 1920년경까지 놀았으나 그 후로는 사라졌으며, 호계 답교놀이는 1930년에 사라졌다. 사라진 이유는 일제의 식민 착취가 심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지고 인심도 각박해져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풍습이 점차 시들어 가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밟기의 악사는 <짠지패>가 주동이 되었으나 호계지역과 만안지역은 다소 차이가 있다. 만안지역에서는 왜장녀 외에 곱추역이 따로 있었으며 탈을 썼다. 놀이구성은 길놀이, 마당놀이, 선소리꾼놀이, 대동놀이, 다리 밟기, 줄다리기, 짚불놀이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호계지역은 무동과 소승 1인, 소무 2인, 별감 1인, 팔복 1인등 5명이었으며, 기타 왜장녀, 곱추, 양반〔샌님〕 등과 선소리꾼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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