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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란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인 해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구에 관한 기록은 신라에서도 자주 보이지만, 14세기 중엽 이후에 출현한 왜구는 침입의 규모와 회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본격적인 침입은 1350년(충정왕 2)에 시작되어 1392년(공양왕 4)에 이르기까지 약 40년 간에 걸쳐 고려의 여러 지역을 유린하였으니, 심지어는 수도 개경 부근까지 출몰하여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는 형편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왜구에 대해 고려 정부는 한때 회유책으로써 이들의 침입을 무마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노력이 별 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358년(공양왕 7)에는 대장군 최영(崔瑩)을 토벌대장으로 임명하여 대대적인 왜구토벌을 단행하였다. 그 후 약 40년에 걸친 왜구와의 싸움에서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나세(羅世)의 진포(鎭浦)전투, 정지(鄭地)의 남해대첩, 그리고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가장 큰 승리로 손꼽는데, 그 중 진포전투과 황산대첩은 서로 관련이 있다.   

1380년(우왕 6) 8월에 왜구는 가장 큰 규모로 침입해왔는데, 이때 왜선 500척이 금강 하구인 진포(鎭浦; 현재의 충남 서천)에 침입하여 각 주군(州郡)을 약탈하였다. 이에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이 출동하여 최무선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사용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진포전투이다.

여기서 살아남은 왜구의 잔당 300여 명이 옥천(沃川)쪽으로 도망하여 앞서 침입한 왜구와 합류하여, 충청도와 경상도 접경 지역에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니 그 폐해의 참혹함이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왜구의 주력 부대는 성주를 거쳐 함양에 집결해 있었는데, 이곳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손실이 상당하였다.

그 후 왜적은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접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고려의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를 토벌하여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체찰사(體察使) 변안열(邊安烈), 원수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과 함께 왜구 토벌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왜구와 고려군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왜구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치루었다. 이 때 왜군 장수 중에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15세의 소년이 있었는데, 힘과 무예가 비범할 뿐아니라 머리에 철로 만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어 아무도 이를 해칠 수 없었다. 이에 이성계가 신궁이었던 그의 활솜씨로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쏘아 벗기고, 이어 여진족 출신의 장수 퉁두란(=이지란)이 벗겨진 이마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왜구는 믿었던 장수가 죽자 혼비백산하여 도주하게 되었으며, 고려군은 도주하는 왜구를 추적하여 모조리 궤멸시켰다. 이 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산대첩으로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특히 이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고려 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왜구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첩의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뜻깊은 전승을 기리기 위해 이성계는 전승 다음해인 1381년에 이곳을 찾아와 황산대첩의 승전을 기리고자 바위벽에 황산싸움에 참전한 자신과 8원수, 4명의 종사관 이름을 새겨두었으니 이것이 어휘각이다. 현재 황산대첩비터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약 50m쯤 가면 바위 한쪽을 기둥 대신으로 삼은 ‘어휘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이 전투의 승리가 자신만의 공이 아닌 여러 장수들의 값진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는 태조 이성계의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황산대첩비가 세워진 것은 1577년(선조 10)의 일이었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했던 황산이 오래 전에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청함에 따라 건립을 명하였다. 이에 호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왕명으로 비문을 짓고, 여성군(礪成君)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호조참판 남응운(南應雲)이 전서를 쓰고, 운봉현감 박광옥(朴光玉)이 세웠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아래에는 귀부(龜趺)가 있고 위에는 운룡무늬의 이수를 덮었는데, 귀부의 높이는 1.2m이고, 비신의 길이는 3.6m에 달하는 거대한 비석이었다. 비문에는 "이성계가 아군보다 10배가 넘는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의 평안함을 이루었으니, 이성계의 업적을 기려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후 1667년(현종 8) 10월에 운봉현감 허제가 관찰사 민진원의 장계로 황산비각을 건립하였고, 1882년(고종 19) 운봉현감 이두현이 어휘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패망을 눈앞에 둔 조선 총독부는 전국 경찰에 항일의식을 북돋는 반시국적 고적(古蹟)을 관할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 파괴하라는 비밀문서를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1943년 11월 24일에 기초된 이 비밀문서는 총독부의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전달하여 각도 경찰부장에게 내려 보냈는데, 이 문서에 의하면 “철거할 물건 중 황산대첩비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방법을 강구할 것. ……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으니,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임”이라 하였다. 이에 1945년 1월 17일 남원경찰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황산대첩비를 폭파하였다. 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어휘각의 암벽에 새긴 각자와 조각난 대첩비의 글자를 정으로 쪼아내 식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 당시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고적 파괴 목록에는 ‘황산대첩비' 이외에도 ‘고양 행주전승비',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공주 명위관임제비', ‘공주 망일사은비', ‘아산 이순신신도비', ‘여수 타루비',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고성 건봉사 명대사기적비', ‘연안 연성대첩비', ‘경흥 전보파호비', ‘회령 고총사타', ‘진주 촉석성충단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역사와 유적을 얼마나 악랄하게 파괴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수난을 겪은 황산대첩비는 해방 후 1957년 국고보조 300만환으로 재건되는데,  비신은 여러 조각이 난데다가 비문을 쪼아 마멸해 버렸으므로 오석(烏石)으로 바꾸어 세웠다. 새로 세워진 대첩비는 높이 4.25m에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다. 또 폭파된 비석 조각들도 한데 모아 파비각(破碑閣)에 보존하였다. 그 후 1963년에는 비를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하고 대신 이 지역을 사적 104호로 지정하였으며, 1973년에는 비전(碑殿)·홍살문·삼문·담장과 부속건물 등을 새로이 정비하고 단장하였다.

현재 비각의 앞에는 ‘황산대첩기념비(荒山大捷紀念碑)'가 서 있는데, 1973년 이 지역의 정화 작업을 일단락 한 다음 황산대첩의 연유와 사적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한글로 작성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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