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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는 북한 개성직할시 개성시 선죽동(善竹洞) 자남산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이다. 북한 국보급 제36호 유적이다. 선죽교는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松都 :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선죽교는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에 의해 피살된 장소로 유명하다.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라고 전하는 붉은 빛이 있다.  철 성분의 산화 흔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고래로 정몽주의 혈흔으로 간주되어 숭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왔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선죽교로 고쳤다고 한다.

선죽교는 돌기둥과 노면(路面)이 맞닿는 부분에 시렁돌을 침목처럼 올리고, 돌기둥 위에 마련된 노면에는 양쪽 가에 긴 난간돌을 놓은 뒤, 여러 줄의 판석(板石)으로 깔았다. 노면 위에는 교량의 난간주 구실을 하는 돌기둥을 3단으로 쌓았다. 1780년(정조 4)에 이르러 정몽주의 후손들이 석난간을 설치하였다. 다리 난간의 너비는 2.54m이고 길이는 6.67m이다. 다리 동쪽에는 한석봉이 '선죽교(善竹橋)'라고 쓴 비가 있고, 선죽교 서편에는 영조와 고종이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하여 1740년과 1872년에 각각 세운 2개의 표충비(表忠碑)가 비각 속에 서 있다. 비각은 선죽교와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으며, 두 비는 암수 거북 위에 세워져 있다. 표충각은 현재 북한의 국보유적 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1740년에 세운 표충비는 「어제 어필 선죽교 시비(御製御筆善竹橋詩碑)」라고 한다.  3.17m의 높이이다. 그 해 가을에 영조는 목청전(穆淸殿)에 들를 때 선죽교를 보고서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다리에 멈추어서 시를 짓고 글씨를 썼다. 『영조실록』의 영조 16년 경신(1740) 9월 3일(신미)의 날에, 선죽교에 이르러 포은공의 절개를 기리고 성균관에 들러 선성을 알현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임금이 행궁(行宮)에서 회가(回駕)하기 위해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렀는데 직접,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道德精忠亘萬古] 태산처럼 높은 절개, 포은공이로다[泰山高節圃隱公]'라는 열 네 글자를 써서 유수로 하여금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또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사적을 기술하여 비석의 뒷면에 새기게 하였으며, 군중(軍中)에 명하여 금고(金鼓)의 소리를 중지하게 하였는데,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그 해 겨울 영조의 어제 어필을 비에 새겨서 세웠다고 한다. 비의 전제(篆題)는 ‘어제어필선죽교시(御製御筆善竹橋詩)'이고, 표면에는 영조의 시가 해서체 글씨로 음각되어 있다. 곧, 위의 실록 기록에 나오는

道德精忠亘萬古, 泰山高節圃隱公(도덕정충긍만고 태산고절포은공)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
태산처럼 높은 절개,  포은 공이로다


의 7언 2구, 14글자를 말한다.  

뒷면에는 ‘어제어필선죽교소지(御製御筆善竹橋小識)'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즉위한 지 16년째 되던 경신년(영조 16, 1740년) 가을 9월 3일 목청전(穆淸殿)을 지나면서 보니 길가에 다리가 있었는데, 이곳이 고려조의 시중(侍中)인 포은(圃隱) 정공(鄭公)이 절개를 지킨 곳이다. 다리에 멈추어서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니, 공의 도덕을 높이고 공의 정충(精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지 이것이 어찌 다만 내가 한때 우연히 감격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또한 우러러 옛날 도(道)를 높이고 충(忠)을 숭상하던 성대한 뜻을 체득하고자 해서이다.

영조는, 시를 지어 비석을 세우는 것은 한때 우연히 감격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몽주의 도덕을 높이고 정충(精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우러러 옛날 도(道)를 높이고 충(忠)을 숭상하던 성대한 뜻을 체득하고자 해서라고 밝혔다.

「어제어필선죽교소지(御製御筆善竹橋小識)」 이외에 별도로 음기(陰記)가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7권의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선죽교(善竹橋) 시(詩)'에 따르면,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음기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영종 경신년(1740, 영조16)에 어가가 송도(松都)로 가다가 선죽교를 지나게 되었는데, 다리에 다다르자 어가를 멈춤으로써 어진 이를 공경하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어제시(御製詩) 및 소지(小識)를 내려 다리 옆에 비(碑)를 세우고 각(閣)을 건립하도록 명하였다. 또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그 비의 음기(陰記)를 짓도록 하였다.

영조는 이 비를 최천약에게 새기게 하였다. 최천약은 무인이면서 기술자였는데, 옥보, 화기, 자명종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뒷날 고종은 1874년(고종 11)에 이 선죽교의 어필각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건축하도록 명하였다.

영조의 어제어필시와 관련하여, 박지원(朴趾源)의 「참봉왕군묘갈명(參奉王君墓碣銘)」에 일화가 있다. 이 글은 『연암집(燕巖集)』 권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 들어 있다.

군은 숙종 병진년(1676, 숙종 2)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겉으로는 겸손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능히 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실오라기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임금이 선죽교(善竹橋)에 거둥하여 어필(御筆)로써 고려 충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기려,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 태산처럼 높은 절개, 포은 공이로다”라 쓰고, 담당자에게 명하여 돌에 새겨 비(碑)를 만들어 다리 입구에 세우게 하였다. 군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종족(宗族)을 거느리고 날마다 비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빗돌을 받치는 귀부(龜趺)가 완성되자 이를 끌어당기는 자가 거의 만 명이었으나, 너무도 무거워서 까딱할 수가 없었다. 비를 세울 날짜는 정해져 있어, 담당자는 그 시기에 대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군이 웃통을 벗고 밧줄을 잡아 ‘호야!' 하고 한 번 끌어당기자 대중들의 힘이 일제히 솟아나, 돌이 가기를 물 흐르듯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담력과 용맹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장차 비각(碑閣)을 건립할 양으로 주춧돌을 고궁의 터에서 캐어 오려 하자 군은 강개한 어조로 말하기를, “이 역사(役事)가 누구를 표창하기 위한 것인데 하필이면 고려 고궁의 대(臺)를 헐어서 한단 말인가!” 하니, 담당자는 말을 못 하고 한참 있다가 탄식하면서, “저 사람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다른 곳에서 주춧돌을 가져왔다.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 고려 왕족의 후예들인 왕씨들이 선죽교의 표충비를 보호하고 고려 왕족의 자긍심을 지키려고 애쓴 자취를 살필 수 있다.

1872년의 표충비는 고종이 세운 것이다. 3.58m 높이이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고종 8년 신미(1871) 5월 28일(정사)에 지제교 이재만(李載晩)을 시켜 교서를 제작하게 하여 개성 유수 이인응(李寅應)에게 내려 주민을 잘 보살피도록 명하고, “온 고을에 현송(絃誦)의 기풍을 창도한 것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구려(舊閭)에 경의(敬意)를 표하게 되고, 백세(百世)하도록 전할 만한 절의(節義)의 소중함을 세운 것은 죽교(竹橋 선죽교)에 남아 있는 비석에서 볼 수 있다.”고 환기한 후, “너의 몸이 하나의 장성(長城)이 되면 동방(東方)이 의지할 것이며, 가슴속에 1만 병갑(兵甲)을 간직하고 있으면 서적(西賊)이 놀랄 것이다.”라고 교시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의 어필각석에 비각을 건축하도록 시켰다. 『승정원일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 무렵에 별도의 표충비를 세우도록 시킨 듯하다.

정몽주는 본관이 영일(迎日)이며,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89년(창왕 1년)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 : 太宗)의 기지로 실패하였다.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비운의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정충(精忠)은 조선 조정에 의해 지속적으로 찬양되고, 고려 왕실의 후예들과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에 의해 오래도록 추억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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